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빅 브러더’에 조종되는 <더 타임스>는 반면교사
언론법·세종시 논쟁, 진보언론 열쇳말은 ‘불균형’
의제설정의 시의성은 기사의 양·질보다 더 중요
언론법·세종시 논쟁, 진보언론 열쇳말은 ‘불균형’
의제설정의 시의성은 기사의 양·질보다 더 중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인수된 뒤 세계의 권위지 반열에서 밀려났다. 1785년에 창간된 이 신문은 링컨 대통령이 “이 세상에 <더 타임스>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말했고, <뉴욕 타임스> <코리아 타임스>처럼 세계 각국 영자지들이 제호를 모방했을 정도로 200년 가까이 권위지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사람들이 <더 타임스>를 ‘런던 타임스’로 깎아내려 부를 만큼 권위가 손상됐다. 영국 좌파 신문이었던 <데일리 헤럴드>의 운명은 더 극적이다. 노동자신문으로 출발한 이 신문은 한때 200만부까지 찍었으나, 광고주에 영합하려고 논조를 우경화하고 제호까지 바꾸는 변신을 꾀하다가 끝내 머독에게 인수됐다. 그것이 바로 황색지의 대명사가 된 <더 선>이다. 현재 290만부 정도 발행하고 주독자층도 여전히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과거의 주독자층이 ‘의식화한’ 노동자들이었다면 지금은 축구와 섹스 기사에 관심이 많은 노동자들이다. 신문이 대중의 욕구에 영합해 만들어지는 한편으로 그들의 의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두 신문의 타락은 언론의 논조가 소유구조에 따라 어떻게 변질되고, 언론이 자기 목소리를 잃게 될 때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가를 말해준다. <더 타임스>는 오랜 기간 ‘천둥신’(The Thunderer)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그 목소리가 컸다.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진 에드워드 8세가 왕관을 포기하도록 몰고 간 것도 이 신문이었다. 그러나 머독 인수 뒤 사업 목적을 위해서라면 보수당은 물론이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도 유착했고, 지금은 다시 집권 가능성이 높아진 보수당을 지지한다. 자본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잦아든 ‘상업적 대중지’가 되고 말았다. 최근 불거진 한국 사회의 수많은 이슈들에 대해 <한겨레>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세종시, 효성그룹, 외국어고, 언론법, 방송인 퇴출, 아동 성폭행 등 숨가쁘게 떠오르는 이슈들을 둘러싸고 ‘보수언론에 맞서 나름대로 선전했노라’고 자부할 수도 있으리라. ‘효성그룹 재수사’ 약속을 말로나마 받아낸 것은 큰 성과였다. 그러나 미흡했던 보도를 지적하는 것이 이 난의 임무라면, 상당수 이슈에서 치열한 내부 논의가 부족해 보이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것을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태도는 우선 이슈 선점에서 밀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보혁을 가릴 필요도 없는 사안조차 보수신문의 뒷북을 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돌아와 연 기자회견에서 세종시 문제 등에 대해 묻지 말도록 한 것과 관련한 보도가 한 사례이다. <조선일보>는 회견 당일 쓴 사설과 데스크 칼럼(10월1일치)에서 1년3개월 만의 기자회견이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일방소통으로 끝났다고 비판했다. 안타까운 점은 <한겨레> 기자 역시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크게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날 스케치 기사에 ‘최대 정치현안인 세종시 문제는 청와대가 난색을 표해 질문에서 배제됐고~’(1일치 5면)라는 대목이 나온다. <한겨레>는 하루 늦게 한 면을 펼쳤지만, 어느 신문의 영향력이 컸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나영이 사건’도 9월22일 <한국방송>(KBS)이 심층보도하고, 10월1일치부터 <중앙> <조선> 등 대부분 신문이 특집 기사들을 쏟아낼 때 <한겨레>는 1일치에 2단짜리 스트레이트 기사만 내보냈다가 뒤늦게 5일 한 면을 할애했다.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일방적 분위기에서 ‘다른 죄와 형평성’ 문제 등을 따져본 것은 남다른 접근이었으나, 다른 신문에 의해 파문이 확산된 뒤 논란에 끼어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앞에 늘어놓은 여섯 가지 이슈 가운데 아동 성폭행 문제를 빼면 보수-진보 언론의 전선이 명확히 그어지는 사안들이다. 세종시, 효성그룹, 외고, 언론법, 방송인 퇴출 문제를 관통하는 비판의 열쇳말은 ‘불균형’과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시는 심각한 수도권 과밀과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고, 효성그룹에 대한 미온적 수사 태도는 ‘법 앞에 평등’ 원칙을 검찰 스스로 허물고 있는 것이다. 외고 또한 교육기회의 불평등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보수진영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심각한 언론지형의 불균형 상태를 더 고착시키겠다는 의도이다.
보수언론이 불균형과 불평등을 감수하고라도 효율과 경쟁을 추구하려 한다면, 진보언론은 그 반대쪽에 서 있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불균형과 불평등이 너무 지나쳐 효율과 경쟁마저 저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의 논리가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이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취약한 자본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담론활동의 방법 자체에도 허술함이 있기 때문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난마처럼 얽힌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한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불균형과 불평등 문제를 푸는 해법은 우선 그 실상을 깊이 파헤치는 것이다. 세종시 관련 보도만 하더라도 수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행정부처 간 비효율 문제보다 더 심각한 지역 불균형의 비효율 문제는 부각되지 못했다. <한겨레>가 1면 머리로 보도한 ‘‘행정도시’ 명칭 건설현장서 사라졌다’(10월15일 1면 머리)거나 ‘‘열받은 충청’ 주민들 촛불 들었다’(16일 3면)는 기사도 지역정서에 기대어 정부를 압박할 수는 있어도 합리적 여론 형성과 정책 수립에는 도움이 안 된다. 세종시 원안에 대한 지지 여론이 다른 지역에서 그리 높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의제 설정에서 시의성은 기사의 양과 질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는 때가 많다. 언론법을 예로 들면 <한겨레>는 지난 7월 법안 날치기 처리를 전후해 적극적으로 논쟁에 가담했으나 8월부터 석 달 동안 사실상 기사 ‘휴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기간은 헌법재판소가 법리를 세우고 여론을 살피는 때였기에 <한겨레>에 막중한 역할이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석 달 동안 내보낸 11회의 ‘미디어’면을 살펴보면, 언론법 관련 기사가 주요기사로 다뤄진 것은 두 번이었다. <경향신문>은 날치기 통과 뒤에도 <한겨레>보다 오래 종합면에서 언론법 이슈를 끌고 나갔고, 10월21일에는 시의적절하게 여론조사를 해 ‘법학교수 61% “미디어법 무효”’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이런 여론조사는 비록 다른 신문이 실시한 것이라 할지라도 별도 기사로 크게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한겨레>는 이 대통령 지지율 여론조사 기사(10월21일 4면)에 제목도 없이 한 줄 끼워 넣는 식으로 처리했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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