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고등학교 1학년 때 일. 그때 나는 기차통학을 했다. 그 시절의 통학차는 일반 여객차와 달리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것이었다. 컨테이너같이 생긴 새카만 화물차 안에 나무벤치 몇 개를 놓은 것이 통학차였고, 그나마도 통학생이 워낙 많아 기차 속은 매양 콩나물시루였다. 달리는 감옥이라고 부르면 어울릴, 그것은 우울했던 내 십대, 자의식의 골방 같았다.
주근깨가 많았으나 속눈썹이 긴 한 여학생이 있었다. 나는 일기에 그 소녀를 가리켜 ‘초목 옆에 나고 초목 옆에서 죽을 것 같다’고 썼다. 나는 자주 정거장 부근에 숨어 기다리고 있다가 소녀가 타는 기차간에 뒤쫓아 올라타곤 했다. 그렇다고 차마 바투 다가서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그 무렵 나는 밤마다 소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다만 소심한 나로서는 쓴 편지를 전할 방도가 없었다. 전해지지 못한 편지는 늘 내 속주머니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날, 또 다음다음날, 밤마다 나는 편지를 새로 썼다. 아마 수백통의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부터 기차 속에서 소녀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사를 간 것인지 아니면 기차통학을 그만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한 후배 작가가 새 책을 냈다 해서 몇몇이 술자리에 모였다. 선후배 작가들이 알맞게 모인 술자리여서 술맛이 유난히 달았다. ‘2차’에 가선 노래도 불렀다. 그렇게 술에 취해 잠시 비몽사몽하는 찰나, 불현듯 상고머리를 한 십대의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술자리는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나는 누군가 잡아주는 택시를 탔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밤거리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한 청년과 꽁지머리를 한 처녀가 어둑신한 플라타너스 그늘에 기대어 뽀뽀를 하고 있는 것이 차창 너머로 재빨리 흘러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지껏 한 번도 맞이해본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2009년의 가을이 이미 와버렸다는 것을.
중국의 대문장가 구양수는 어느날 글을 읽고 있었다. 밤이 깊어 사위 적막한데 어디선가 쌀 씻는 소리가 쏴아, 들려왔다. 그 소리는 이내 분등(奔騰)하여 물속에 돌을 굴리는 듯, 천군만마가 지쳐 들어오는 듯 했다. 밖을 살피고 온 동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달이 밝고 은하수는 선명하오나, 사람이라곤 자취도 없나이다. 소리는 다만 숲 속에 있을 뿐입니다’ 했다. 구양수는 ‘어허, 이것이 가을 소리라고 하는 것이구나!’ 탄식했다. 구양수는 이로써 가을을 가리켜 형관(刑官)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가을을 두고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며,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燈籠)’ 그리고 ‘코스모스 무참’이라고 덧붙여 썼다. 그러나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은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라 하고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이 파고, 다 타버린 재를-죽어버린 꿈의 시체를-땅속 깊이 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있다.
나는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다. 술은 이미 다 깼고 늙어가는 ‘마누라’는 벌써 잠들었으니 천지 고요한데, 희부연 달빛 아래 북악의 능선만이 선연하다. 저잣거리의 풍경들은 다 전생의 일이었던 것처럼 벌써 아슴푸레할 뿐이다. 나는 옛날처럼, 편지를 쓰려고 백지 한 장을 책상 위에 펴놓고 연필을 깎는다. 아우성치는 문명의 끝에 밀려나 있어도 옳거니, 가을이란 이렇게 제 마음자리 속으로 기어코 돌아와 앉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앉아 있다가 나는 깎은 연필심을 다시 부러뜨리고 새로 깎기 시작한다. 편지를 부쳐야 할 대상이 영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의 그 소녀에게 쓸 것인가. 연필을 깎고, 깎은 연필심을 또 부러뜨리고… 아마 나는 밤새 무위한 이 짓을 반복하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 아, 2009년의 가을이 이렇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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