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건국가 행진’ 저지는 진보언론의 시대적 소명. 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성묘 길에 떠오르는 상념은 저마다 다르리라. 안동이 고향인 우리 집안은 지지난 주말 일찌감치 벌초를 하고 농암 이현보 선생 종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50명 가까운 대가족이 참석하는 행사인데 올해는 다른 가문에서 종택 체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특히 일행을 사로잡은 것은 수몰을 피해 옮겨온 종택에서 바라보는 도산의 빼어난 산수였다. ‘안동’ 하면 풍광 좋은 강 마을로 하회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어부가를 낳은 도산에는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도 농암의 17대 종손 이성원씨는 “안동댐으로 도산 9곡 가운데 6곡이 물에 잠겼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라는 저서에서 “지금 안동댐을 건설하려면 동강댐 100배 이상 저항을 받을 것”이라며 “안동댐 수위를 몇 미터만 낮추었더라면 도산은 고스란히 보존됐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도산 9곡을 따라 청량산 어귀까지 굽이마다 자리잡은 옛 마을과 종택, 서원, 향교, 누정 등은 ‘한국문화 1번지’라 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대부분 수몰되거나 덩그러니 산비탈에 올라앉아 쓸쓸함을 더한다. 당시 댐 건설의 타당성과 규모의 적정성에 대한 논의는 ‘다목적댐’이라는 매혹적인 구호 아래 꺼내지도 못한 채 공사가 강행됐다. 날로 커가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의 가치에 눈뜨지 못한 시절이었다. 문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지금도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빠름’에 대한 욕망에 편승해 고속도로 등 과다 건설
이익 챙기고 부담은 국민에게…‘건설족’ 제동 걸어야
극심한 환경훼손 고발하고 정책전환 공론장 구실을 강원도를 가로지른 올여름 휴가 길과 올가을 성묘 길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거침없이 파헤쳐지고 있는 국토의 상처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절개면을 남기며 산을 깎고, 들과 마을 위로 까마득히 달리는 평탄한 일직선도로는 ‘느림’에 대한 혐오와 ‘빠름’에 대한 욕망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목적만 중요할 뿐 과정은 생략될수록 좋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라는 명제 앞에 산세와 하천의 흐름, 마을의 경관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7월 개통된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소설가 한수산씨는 ‘21개의 터널이 구름다리처럼 이어지는 하늘에 떠 있는 길’, ‘53개의 다리가 산과 산을 잇는 웅장한 길’(중앙일보 7월2일치 ‘서울~춘천 고속도로 특집’)이라고 예찬했다. 과거의 고속도로가 그나마 지세를 고려했던 것과 개념이 다르다. 실제로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달려보니 불과 반시간 남짓. 일순간 ‘뭣 하러 이렇게 빨리 달려왔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강원도 교통망 구축사업에 따르면 서울~춘천~양양을 잇는 동서고속도로 말고도 제2영동고속도로 등 남북 3축 동서 4축의 간선도로망을 구축해 강원도 어디든 2시간대면 갈 수 있게 한단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강원도의 미래 가치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있다는 것, 관광은 느림과 여유를 찾아 떠나는 소비행위라는 것이다. 유럽 등의 이름난 관광지들이 좀처럼 주변 도로를 넓히지 않는 이유를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한 <한겨레> 보도들은 지엽적인 데 치우친 감이 있다. 광고 유치용 ‘고속도로 예찬 특집’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렇다고 토건국가 광풍을 제어하는 데 기여한 것도 아니었다. 서울~춘천 고속도로 개통 당시 ‘기업유치 성장 기대, 베드타운 전락 불안’(7월15일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불안요소를 몇 줄 언급하는 데 그쳤다. 새만금과 포항을 잇는 새 고속도로 건설계획 기사는 1면 오른쪽에 길게 배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1단짜리 스트레이트로만 처리됐다.(9월10일치) 동서 6축인 서천~영덕 고속도로 등에 이어 기어코 남한을 조밀한 고속도로의 격자 속으로 집어넣겠다는 발상이다. 고속철도망이 겹으로 덧씌워지고 있고 인구 일이십만의 소도시에도 이미 수많은 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다. 바야흐로 전 국토에 건설중장비 소리가 진동하면서 세계 최고 토건국가의 면모를 과시한다. ‘민자사업 손실, 세금으로 1조5천억 메웠다’(9월18일치)처럼 크게 다룬 기획기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발적이었다. <한겨레>가 전체적으로 남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토건국가 행진’을 저지하겠다는 편집국 차원의 의지와 프레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부·여당의 프레임과 그것을 지지하는 대부분 보수언론의 논조는 여전히 육해공을 망라하는 교통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경기회복을 위해서도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토해양부가 도로 부족 근거로 내세우는 인구 1000명당 도로 길이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기 때문이다. 국토면적당으로 계산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도로 선진국’이다. 더구나 우리는 고속철도가 깔리고 있고, 한편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토지가 절대 부족한 나라이다. 4대강 투자가 없었던 2008년의 건설투자 비율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의 18.5%로 선진국의 2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2008년 국민 1인당 시멘트 사용량은 1140㎏으로 20㎏짜리 시멘트 57부대씩을 썼다. 일본 진보언론이 ‘건설족의 나라’로 불렀던 일본의 2배가 넘는다. 일본은 뒤늦게나마 반성을 했고 정권도 교체됐다. 건설투자에 의한 경기부양론도 경기가 상승하는 국면이니 설득력이 없어졌다. 재정적자도 심각하게 우려된다. 그런데도 국가예산을 건설부문에 ‘올인’하다시피 퍼붓는 것은 우리도 어느새 ‘건설족’이 국가경영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대자본, 정치인과 관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학자, 거기에 상당수 보수언론이 여론몰이에 가세한다. 그러나 <한겨레>를 포함한 진보언론은 신개발주의의 상충하는 가치와 욕구,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공론장에서 조정할 의지가 부족하다. 민자유치 건설사업은 ‘건설족’이 결탁해 이익을 나눠 갖고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대표적 사례다. 인천공항철도는 최소수입보장제 덫에 걸려 현대-대림 등의 컨소시엄에 넘겨야 할 국민 부담이 공사비의 3배인 13조80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용객이 예측 수요의 7%에 불과하다는데 그것을 건설사와 공무원의 단순한 예측 착오로 봐줄 수 있을까? 일단 일을 벌이기 위해 수요는 과다, 공사비는 과소 계상하는 것이 전래의 수법이다. 언론에 화려하게 소개된 인천대교를 포함하는 인천공항고속도로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 요지의 빌딩들을 헐값에 사들인 자산운용사 매쿼리는 인천공항고속도로와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포함하는 15개 대규모 민자사업에 투자했다. 매쿼리 한국법인의 공동창업자는 이상득 의원의 외아들이었다. 4대강 사업은 예비 타당성조사도 없이 서둘러 착공하려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여당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라”고 당부했고, 18일 구미에서는 “4대강 사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타당성조사를 사업의 장애로 여기는 건설업자라면 몰라도 대통령이 할 얘기는 아니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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