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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눈] 칼럼과 여론면 혁신으로 진보신문 활로 찾아야

등록 2009-08-26 21:11

칼럼과 여론면 혁신으로 진보신문 활로 찾아야. 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칼럼과 여론면 혁신으로 진보신문 활로 찾아야. 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가디언’ 홍보부장 “논평과 분석은 신문의 핵심적 역할”
쌍방향 플랫폼과 종이신문 연결…반대 목소리도 전해야
칼럼진 구성 경쟁도입…읽히는 칼럼 위해 ‘4 i’ 갖췄으면
이름난 군사전략가들은 전쟁의 환경 변화를 미리 포착해 그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고 적용한 자들이다. 나폴레옹은 전세를 좌우하는 병과가 기병에서 포병으로, 패튼은 포병에서 기갑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포병전술과 기갑전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일본 해군이 태평양전쟁에서 괴멸된 한 요인도 거함거포주의에 빠져 항공모함 시대를 일찍 내다보지 못한 탓이었다.

‘신문 위기의 시대’에 국내외 언론과 자본이 방송 진출을 매개로 연합세력을 형성하면서 독립언론들은 전혀 겪어보지 못한 내우외환의 환경으로 몰리고 있다. 위기 타개의 묘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영국의 진보신문 <가디언>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세계 신문업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가디언>의 지면혁신은 ‘베를리너판’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판형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용 변화다. 판형 변화는 윤전기 교체를 수반하기 때문에 독립언론사들은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하지만 내용 변화는 에디터들과 기자들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상당 부분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2005년 <가디언>이 베를리너판으로 전환하면서 특히 중점을 둔 게 오피니언면이다. 오피니언면을 광고 없이 5개 면으로 확대하고, 아예 자사 광고를 통해 오피니언(의견) 저널리즘을 추구하겠다고 천명했다. 눈 덮인 벌판에 신문배달 소년이 걸어가고 있는 사진 아래 ‘소란스런 도심에도 눈 덮인 벌판에도 우리는 논평과 분석을 배달한다’는 광고 카피가 인상적이었다.

<가디언> 홍보부장 다이앤 히스는 26일 전화 인터뷰에서 “논평과 분석은 신문의 핵심 역할이 됐으며, 독자들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알리는 것 외에도 교육하고 자극하고 도울 의무가 있다”며 <가디언>의 전략을 자세히 전했다. 그는 또 “논평은 쌍방향적이어야 하기에 ‘논평은 자유’(Comment is Free)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었다”며 “매일 50건 이상 다양한 목소리가 실리는 플랫폼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 필진과 경쟁하고 토론한다”고 설명했다.

지식인층의 토론마당이 된 이 플랫폼의 글들은 독자 편지들과 함께 종이신문에서도 매일 한 면을 차지하는데, 사설면과 마주 보는 면(op-ed)에 배치해 예우한다. 신문은 속보성을 필요로 하는 뉴스 전달자의 기능을 다른 매체들에 양보할 수밖에 없으니 대신 담론을 만들어내고 토론하는 공론장 구실을 확실히 떠맡겠다는 각오다.

<한겨레>도 ‘토론마당’(한토마)이나 ‘왜냐면’을 운용하고 있지만 ‘왜냐면’은 일주일에 두 번 방송면 옆에 실리는 정도이고 온라인과 종이신문의 연결고리도 허약해 보인다. <한겨레> 필진이 쓴 사설과 칼럼에 대한 <온라인> 필자의 논평이 종이신문에도 실리고, 다시 <한겨레> 필진이 반박하거나 다른 독자들까지 끼어들어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을 볼 수는 없을까?

이런 포맷은 보수성향이 아니면서도 한겨레 논조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독자로 끌어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가디언은 <한겨레>보다 훨씬 진보적인 논조를 펴지만 독자면에는 반대편 목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1872년부터 57년간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면서 <가디언>의 기반을 닦은 찰스 스콧의 정신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가디언>이 보수층에게도 인정받는 비결 중 하나이다. 그는 1921년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코멘트는 자유다, 하지만 팩트는 신성하다, 지지자와 마찬가지로 반대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썼다. 히스 홍보부장은 “독자들의 글을 신문에 게재할 때도 그 내용이 솔직하고 공정해야 하는 등 <가디언>의 일반적인 편집 가이드라인이 적용된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물론이고 오피니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르몽드> <인디펜던트> 등 유럽의 권위지들한테 꼭 배워야 할 것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다. 스트레이트 기사에 기자 의견이 마구 뒤섞이고, 사실의 자의적 해석이나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 한국 신문과는 판이한 점이다.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남의 말을 인용할 때조차 <한겨레>도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서술어가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기자가 진영논리에 빠져 자기 편으로 여기는 사람의 말 뒤에는 ‘강조했다’ ‘지적했다’ ‘꼬집었다’ ‘통박했다’ 등으로 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반대 진영 사람의 말 뒤에는 ‘주장했다’ ‘강변했다’ 등으로 말의 권위를 허무는 서술어를 붙이는 식이다.

유럽의 진보신문들은 오피니언 저널리즘의 선두주자로 뛰는데, 역시 이념지가 될 수밖에 없는 <한겨레>는 지면 할당에서도 밀린다. <가디언>은 물론이고 국내 보수신문에 견주어도 ‘여론면’의 수가 너무 적다. <조선> <중앙> <동아>의 오피니언면은 매일 세 면인데 <한겨레>는 ‘왜냐면’이 실리는 월·목요일을 빼면 두 면으로 운용된다.

또 필진도 ‘진보논객의 집결지’라 할 만큼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창간 직후 <한겨레>가 선풍을 일으켰던 요인 중 하나는 송건호 임재경 권근술 리영희 최일남 김금수 최장집 김종철 신홍범 조영래 정운영 등 9인으로 구성된 쟁쟁한 필진이었다. 지금도 젊은 논객들을 중심으로 최강의 필진을 갖추는 것은 노력하면 어렵지 않을 터이다. 과거에 정파성을 문제 삼으며 <한겨레>에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외부 필자까지도 정중하게 다시 ‘모시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객원 논설위원 칼럼을 없앤 것은 구조조정의 수단이 돼야 할 ‘아웃소싱’마저 포기한 건가? 너무 자주 집필 순서가 돌아와 억지로 쓰는 듯한 내부 칼럼도 눈에 띈다. 국제부문 에디터가 ‘광주와 노무현’(6월4일치)을 쓰는 등 큰 사건이 터지면 같은 주제로 비슷한 얘기들을 늘어놓는 경우도 흔하다. 일선기자 칼럼도 너무 뜸하게 나와 ‘내부 필진 양성소’ 구실을 못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쓰는 고정 칼럼니스트가 너무 많으면 현안 중심의 이슈 싸움에서도 불리하다. 정치 관련 큰 현안이 터지면 정치 담당 필진이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연속으로 쓰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일간지는 분야별로 다수의 비정기 칼럼 집필진을 구성해두고 시론 형태의 글을 자주 싣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내부 칼럼진 구성에도 경쟁을 도입하고, 오랜 기간 칼럼을 써온 필자에게는 재충전의 기간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오피니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영국의 권위지들을 9년 가까이 접하면서 알아내고 싶었던 의문은 세계적 명성의 칼럼니스트들이 읽히는 칼럼을 쓰기 위해 어떤 수법을 동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수법의 키워드를 뽑아보니 공교롭게도 ‘i’로 시작하는 네 단어로 요약됐다.

첫째, 새로운 정보가 있다(informative). 정보가 있는 칼럼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취재한다. 그러나 <한겨레>를 포함한 국내 신문 칼럼이나 사설 중에는 처음 상당 부분을 스트레이트 기사 재탕으로 채우는 경우도 흔하다.

둘째,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intellectual). 한국방송(KBS)에 입사한 한 제자는 세미나 시간에 “쉬고 싶을 때 방송을 보고, 똑똑해지고 싶을 때 신문을 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모두들 ‘아, 그래’라는 반응이었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셋째, 흥미롭다(interesting). 재미없는 칼럼은 읽는 것도 고역이어서 독자의 이탈을 가져온다.

넷째, 영향력이 있다(influential). 폴 크루그먼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칼럼이 상당수 대중을 격분시키지 않는다면 그 필자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라고 써놓았다.

주관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한겨레> 칼럼들은 이 ‘4 i’ 가운데 몇 가지나 충족할까? 오피니언면과 칼럼의 획기적 업그레이드! 그것이 위기에 처한 진보신문의 구명줄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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