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은 지난 20일치 칼럼에서 개혁적인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민간의 자발적 참여를 강조했다. 평소 비슷한 주장을 해온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공감하기에 그 논지를 발전시켜 볼까 한다. 이 소장도 절감하고 있겠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이유가 뭘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가장 주목하는 건 ‘열정의 제도화’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우리의 풍토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잠시 지난해 촛불집회 정국으로 돌아가보자.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이 촛불집회에 감격하여 예찬론을 쏟아놓을 때에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나는 당시 그의 주장을 촛불집회에서 발산된 열정의 제도화를 고민해보자는 제안으로 읽었다. 즉, 촛불집회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고민을 해보는 게 언론과 지식인의 몫이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최 교수의 주장이 어느 극우 논객의 주장과 비슷하다거나 최 교수가 민중을 무시하는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비판의 수준이 너무도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지만, 그게 개혁·진보세력의 고질적 습속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한국 사회에서 발산되는 집단적인 열정은 대부분 ‘반(反)정치 열정’이다. 정당은 썩은 집단으로 간주된다. 정당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우리는 지난 정권의 경험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기간당원제를 시도했지만, 우리 풍토에서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지지하는 기간당원제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른 방식으로 정당을 살릴 수는 없을까? 지난 대선·총선의 처참한 패배와 관련해 우리가 뼈아프게 성찰하고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건 마땅히 해야 할 고민이겠건만, 우리는 아직도 1970~80년대에 민주화 시위를 하듯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대하고 있다.
싱크탱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 사회적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건 삼성경제연구소다. 어느 시점 한 달 동안 18개 주요 일간지의 삼성경제연구소 인용 보도는 251건이나 되었다. 사실상 정치·사회 분야의 싱크탱크 기능을 하고 있는 언론의 경우 압도적으로 보수 일색이다. 이걸 그대로 방치한 채 무슨 큰일이 터질 때만 광장으로 몰려나가 시위를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그런 시위를 할 때 하더라도 그 열정을 제도화하는 고민을 같이 해보면 안 되는 걸까? 무엇에 반대하는 운동도 소중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친 이 시점에선 무엇을 만들어내는 운동에 들어가야 할 때가 아닐까?
지금 삼성의 전 계열사들은 오래전부터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광고를 끊는 정치적 보복을 자행하고 있다. 경영 위기를 초래해 말려 죽이겠다는 심보로 보인다. 특정 언론사에 광고를 주느냐 마느냐 하는 건 전적으로 사기업의 고유 권한이다. 이게 그들의 정당화 논리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엔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며, 사법부는 그런 논리하에 그간 삼성에 엄청난 특혜를 베풀어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삼성의 이런 파렴치한 작태를 그대로 방치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나는 삼성 불매운동을 제안하고 싶진 않다. 아니 오히려 반대한다.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삼성이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우습게 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습게 볼 수 없을 만큼 이 신문들의 힘을 키워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광장에 나가 열정을 발산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자신들의 목소리와 비교적 가까운 언론을 키우는 일이다. 이게 바로 열정의 제도화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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