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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중도실용이 신뢰받으려면 / 박창식

등록 2009-08-18 21:07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중도실용을 국정기조로 제시했다. 중도실용은 괜찮은 것일까? 역주행 시비를 빚은 그동안의 퇴행적 국정운영에서 벗어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중도실용 기조는 4·29 재보선 패배 뒤 한나라당에서 제기된 쇄신론과 잇닿아 있다. 여권 인사들의 사석 설명에 따르면 ‘가진 자 위주’ 또는 수구적 국정운영 행태가 민심이반을 불러왔던 데 대한 성찰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 논법은 의아스럽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쉽게 둘로 갈라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우리의 삶을 메마르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도실용은 우리가 둘로 나누어 보았던 자유와 평등, 민주화와 산업화, 성장과 복지, 민족과 세계를 모두 상생의 가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아마 전임 정부 또는 전임 정부를 지지한 세력이 ‘이러한 이분법’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성장과 복지 문제를 두고 노무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이루는 동반성장’을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그런 목표가 실제 달성됐느냐와 별개로, 성장과 복지는 이미 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주장했다. 복지제도의 남용으로 개인의 노동의욕을 떨어뜨려선 안 된다며, 일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한테는 실업수당을 줄 수 없다는 개념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성장이냐 복지냐의 이분법보다는, 성장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국정기조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의문이 든다. 누가 이분법을 택했단 말인가. 성장과 복지의 이분법이 지배적 담론이 되었던 적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어느 시대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마치 그런 세력이 존재하는 듯 사실과 다른 허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비판하는 ‘허상 때리기’를 하는 것 아닌가.

이 대통령은 같은 경축사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증오의 감정에 휩싸여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화와 합리적 절차를 존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역시 의아스럽다. 미네르바 구속에서 용산 철거민 참사, 시국선언 전교조 교사 대량 징계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측면을 싹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논리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흠집난 논증을 오류라고 부른다. 그중에서 관련이 없거나 실제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은 원인을 거론함으로써 논제와 동떨어진 추론을 하는 경우를 ‘연유의 오류’라고 한다. 이 대통령은 논리를 따르지 않고, 편리한 대로 갖다 붙이는 연유의 오류를 종종 범했는데 이번 경축사가 꼭 그 모양이다.

국정기조 수정을 고민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자 애를 쓰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새로운 기조가 실제 정책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관찰할 필요가 있으며,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겠다고 밝힌 사회통합위원회도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중도실용 기조를 국정기조로 천명하는 과정에선 꼭 필요한 일들이 누락된 것 같다. 즉 지난 1년 반 국정운영에서 나타난 퇴행적 측면들을 진솔하게 성찰하고 인정해야 했다. 이어 청와대 및 내각 개편 단계에서 잘못된 국정운영에 관여된 고위직 인사들을 쇄신해야 한다. 지금처럼 근거가 박약한 이분법으로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식으로 해서는 중도실용론도 국민들한테 진정성과 신뢰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박창식 정치부문 선임기자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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