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 큰 기대를 걸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 “핵무기는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의 장래를 더욱 어렵게 할 뿐”이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러한 발언의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이 비핵화의 결심을 보여준다면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을 추진할 것”이라는 핵심적 대목을 보자. 이는 북이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북이 핵 카드를 고집하는 것은 체제 안보나 대미 협상에서 더 큰 경제적 양보를 얻어 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핵 및 재래식 위협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보환경을 만드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의 ‘선 비핵화’와 남의 ‘후 평화구상’ 제안은 다분히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북-미 관계 및 북-일 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선행 또는 병행되는 평화구상을 통해서만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핵 개방 3000’ 구상의 우월주의와 일방주의가 이번 경축사에서도 그냥 녹아 있다.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북한 주민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국제협력 프로그램은 북한이 주도해야 할 사항이지 우리 몫이 아니다. 신생국가도 아닌 북이 비핵화의 결단을 내리고 정상국가가 된다면 우리 중재 없이도 얼마든지 국제사회의 지원 체계를 구축,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고위급 회의를 설치하고 관련국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생활향상 분야에 걸친 대북 5대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대목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2007년 10·4 정상 선언과 12·1 남북 총리회담을 통해 남북 간 고위급 회의와 의제가 이미 구체화되어 있지 않는가. 이를 다시 새롭게 거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남북 간 ‘재래식 무기의 감축’ 논의를 제안한 것은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남북 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신뢰 구축 없이 어떻게 재래식 무기 감축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인가. 특히 군사훈련의 상호 통보 및 참관, 직통전화 가설 및 운용, 군사정보 교환 및 교류, 공동 위기관리센터의 설치 운용, 그리고 공세적 무기의 후방 배치와 같은 군사적 신뢰 구축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재래식 군비 감축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북관계가 양호했던 지난 진보정부에서도 북이 거부했던 재래식 군비 감축 제안을 요즈음 같은 대결 국면에서 북이 수용할 리 만무하다.
이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는 이런 문제들을 두고 남과 북이 만나서 대화해야 할 때”이고 “언제, 어떠한 수준에서든 남북 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력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는 건설적 제안이다. 그러나 6·15와 10·4 선언에 대한 명시적 인정이 담보되지 않는 이러한 제안의 진정성을 북이 믿을까. 과거에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물밑 접촉을 하고 사전 조율을 한 후 8·15 경축사에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북 제안을 포함시키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변화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선 국면에서 내걸었던 ‘원칙’에 대한 강조가 매몰차게 남아 있다. 반전의 지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게 중도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참뜻인지 심각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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