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소금과 죽음 / 황현산

등록 2009-08-14 19:49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며칠 전 현대시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보들레르의 시 <죽음의 춤>을 읽었다. 부르주아들의 흥청망청한 잔치판에 난입하여 무섭고도 멋진 춤을 추는 해골의 장난을 능숙한 선율로 길게 읊어내는 이 시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미래의 환상에 젖어 자신들이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하는 속물 군상들을 통렬하게 야유하는 노래로 흔히 해석된다. 그런데 저녁 회식 자리에서 화제가 어떻게 물꼬를 틀었는지 죽음 이야기가 어느새 고향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작은 섬 비금도다. 인구 3000명이 조금 넘는 영락없는 낙도이지만 자랑할 것이 없지 않다. 천재 소년기사 이세돌의 고향이며, 맛이 특별한 시금치 ‘섬초’와 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천일염 ‘비금소금’의 생산지다. 무엇보다도 소금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일제 말에 우리 고향의 박삼만이라는 어른이 징용으로 끌려나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평안도의 한 염전에서 몇 년 동안 노역을 했다. 위대하다고 말해야 할 이 인물은 글자도 깨치지 못한 처지였지만 사람됨이 총명하고 곡진해서 염전의 구조와 소금 생산 과정, 도구 제작 방법과 사용법 등을 낱낱이 마음속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해방이 되어 집에 돌아온 이 어른은 염전에 대해 자기가 아는 바를 구술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적게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이 기록을 토대로 그 너른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 중부 이남에서 최초로 천일염을 생산하였다.

정부도 이 작은 섬을 주목하였다. 토목기술자들을 내려보내 염전의 확장을 독려하고, 전매청을 통해 생산된 소금을 전량 수매하였다. 게다가 내 모교인 비금초등학교를 ‘염부양성국민학교’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염부 양성을 위해 특별한 교과과정을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후 조치 같은 것도 전혀 없었지만, 서류상으로라도 학교에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으니, 내가 ‘특목초등학교’ 출신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후 정부의 소금 정책이 바뀌어 많은 염전이 폐지되고, 소금 생산 방식도 소금의 때깔만 좋게 하고 질과 맛을 나쁘게 하는 편으로 바뀌었다. 염전의 결정지에 비닐장판을 깔아 ‘장판염’을 생산하고, 도자기 타일을 깔아 ‘도판염’을 긁어 들였다. 가장 좋은 천일염은 맨흙에서 얻어내는 ‘토판염’이지만, 소금에 흙빛이 남아 있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서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내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특목초’를 졸업한 나는 염부가 되기는커녕,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짠물에 발을 적시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집안 어른들의 소망대로 책상 앞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의 춤> 같은 시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 “간첩 싹 잡아들이라 한 것” 누가 믿을까? [2월5일 뉴스뷰리핑] 1.

윤석열 “간첩 싹 잡아들이라 한 것” 누가 믿을까? [2월5일 뉴스뷰리핑]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2.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민주주의 흔드는 ‘레드 콤플렉스’ [하종강 칼럼] 3.

민주주의 흔드는 ‘레드 콤플렉스’ [하종강 칼럼]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4.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5.

헌법이 구타당하는 시대 [세상읽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