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요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작년에 건축허가를 내고는 재정 사정으로 미루었는데 가족은 늘어나고 허가 기간도 있고 해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보는 이들은 한결같이 공간이 너무 작지 않으냐 말한다. 60평 공간에 다섯 세대와 손님방까지 곁들었으니 그렇게 봄직도 하다. 그래도 한여름에도 밤이면 춥고 연중 열 달은 난방을 하는 지대라서 집이 작고 천장도 낮아야 한다. 산간 지역 전통이 그렇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갈수록 너무 넓게만 살려 한다. 옛날처럼 일고여덟 가족이 한이불 아래 부채처럼 발을 꽂고 살자는 것은 아니지만, 1~2인 가구 비중이 작년 말 43%라는 통계를 보건대도, 우리나라 집들은 너무 크기만 하다.
생활 공간을 작게 차지하고 사는 데는 일본인들의 전통이 유명하다. 난방도 별로 안 하는 거실과 안방 화장실 모두가 오밀조밀하다. 심지어 신도시 고급 아파트조차도 그렇다. 잇토엔(一燈園) 공동체의 창설자인 니시다 덴코 선생은 필요한 공간을 짚 매트(다다미) 기준으로 보아 ‘앉으면 반 장, 누우면 한 장’이라 했다. 우리에게 이제 집이란 이미 보유 자산 개념이며 상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주소지는 있지만 가족들의 생로병사의 역사가 담길 생가도 고향도 없어졌다. 집이란 삶에 정말 소중한 환경일진대 중고 상품 정도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밥도 집도 생존과 관계의 삶에 소중한 요소이니 공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력한 존재들은 생명을 박탈당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존에 필수적으로 소중한 것은 사고팔거나, 차지하려 싸우지 말도록 아예 흔하게 창조하셨다. 공기와 물과 햇빛이 그렇지 않은가. 흔한 것은 하느님의 소유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하느님의 것을 제 것인 양 상품으로 거래한다. 가게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는 일이 일상이 된 지 불과 15년 정도다. 왼손에 생수 오른손에 산소 캔을 들고 다니는 날이 오면 재앙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식주를 보면 하느님이 세상을 공평하게 창조하였음을 믿게 한다. 천만원짜리 명품 핸드백이라고 두 개 들고 다닐 수 없고,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라고 두 벌을 껴입을 수는 없다. 귀한 진수성찬도 한 끼 한 그릇, 하루 세 끼 이상을 먹을 수가 없다. 고광대실 100평 아파트라 해도 자는 데는 방 하나면 족하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것도 필요 이상의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다. 번뇌와 고통의 화구가 되기 쉽다. 삶이 빛날 수 없고 천박하게 만들 뿐이다. 다만 그것이 필요함에도 얻지 못한 이의 몫으로 삼을 때만이 하느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자장면도 많이 주는 곳을 가지만 이제는 맛있는 집을 찾는다. 양에서 질적 삶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이치다. 그러므로 집도 얼마나 넓고 잘 꾸미고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으로 발전할 것인가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배고픈 시대의 노동자는 임금으로 착취당하고 배부른 시대에는 문화로 착취당한다. 수입의 대부분을 문화·교육비로 뺏기는 것이 그것이다. 자발적으로 바친다. 땀 흘려 일하고 목숨 걸고 일자리를 지키고 임금을 확보한들 자신도 자녀도 임금 노예의 삶은 피할 길 없음을 명심할 것이다. 가치의 삶으로 승부해야만 한다. 의식주가 해결되고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무엇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공동 공간은 넓게, 개인 공간은 작게 사는 우리는 한가족이 열평 집에 살아도 부족함이 없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작은 삶에 행복의 비결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옥상 콘크리트 타설을 하는 날이다.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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