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난 7월16일치 주요 일간지 여러 곳에 아주 해괴한 5단 전단 광고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자유주의 진보연합’이라는 단체의 창립을 알리는 이 광고는 “자유주의가 진정한 진보다”라고 선언하면서 민주당,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교조, 진보연대 모두를 기득권에 안주하는 수구세력으로 싸잡아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이 광고는 “종북주의자,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사취해 갔던 ‘진보’의 의미를 탈환하기 위한 싸움의 시작”을 의미심장하게 알리고 있다.
보수의 ‘진보 탈환전’은 지난 4월 박효종 교수를 중심으로 이미 선포되었다. 박 교수는 정명론(正名論) 운운하며 “헌법적 가치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세계사적 흐름이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그리고 진보의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는 친북좌파 세력을 “‘진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검은 백조’처럼 모순적 표현의 극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비판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무엇이 진보인가? 진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보통명사로서 진보이다. 이는 주어진 사회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부단히 개선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보수진영에서는 의미론적 혼선을 피하기 위해 ‘진보’ 대신 ‘선진’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해 왔다. 이 경우 ‘진보’라는 용어가 ‘사취’당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유명사로서의 진보 개념이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발흥한 진보주의에서 파생한 개념으로, 자본주의 심화와 민주주의의 기득권화에 따른 각종 모순과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한 이념적·정책적 대응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진보주의는 국가 개입을 통한 시장 실패의 교정, 빈민 구제, 교육, 의료서비스의 보편화 등을 통한 적극적 사회정책 전개, 복지를 통한 성장의 모색, 대기업의 독과점 방지, 그리고 환경 보호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 대안을 요체로 삼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독점 현상을 막기 위해 일반시민의 참정권 확대를 옹호했고 노사정 3자의 새로운 정치적 협의체 구성에 역점을 둔 바 있다. 이는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 유럽의 사민당 또는 노동당의 정강 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이념적 사조를 자유주의(liberalism)라 칭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시장 우선주의, 작은 정부, 감세와 규제 혁파를 통한 성장 등 하이에크가 주장해온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에 이념적 근거를 두고 있는 뉴라이트로서는 위에 논의한 진보주의를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진보’에 연연하는 것인가. 보수라는 용어가 진부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한국적 보수와 보편적 보수 간의 내재적 상치 현상에 있다. 이들이 추앙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중소상인과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적 이념 노선을 표방했고, 이들의 또다른 영웅인 박정희 대통령 역시 자유지상주의 또는 영미식 보수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개발국가’ 모델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뉴라이트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하자. ‘하얀 백조’만 강조하고, 비판적인 인사들을 ‘종북주의자, 가짜 민주주의자’로 매도하는 동시에 정권 잡았다고 ‘진보’의 이름까지 일방적으로 바꾸려는 세력, 이들이야말로 ‘열린 사회의 적’인 것이다. 이제 제발 정명과 색깔의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겸허한 자세로 소통, 화해, 통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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