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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지하철의 디엠비족 / 백기철

등록 2009-07-22 20:50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자서전에서 하루 중 가장 창조적인 때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조깅하는 시간이라고 적었다. ‘월가의 황제’에서 뉴욕시장으로 이어지는 성공 가도에서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의 상당수는 조깅하는 동안 떠올랐다고 한다. 달리기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마냥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육체적 고통이 희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때가 있다. 참신한 생각의 단서들이 마구 쏟아지는 순간이다.

얼마 전 헬스클럽을 찾았다. 멀리 창밖을 보며 ‘달리기 삼매경’에 빠져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러닝머신에 오르니 얼굴 바로 앞에 모니터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옆에선 그 모니터로 무언가를 시청하며 운동들을 하고 있었다. 창밖을 볼 수 없으니 당연히 창 너머 바깥 세계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끈도 차단된다.

세상 모든 곳에 영상과 화면이 넘쳐난다.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택시를 타도 바깥 풍경을 구경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앞좌석 뒤판에 모니터를 박아놓고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하도록 한다. 드라마와 광고가 교묘히 섞여 나온다. 얼마 전 실제 경험한 일이다. 모니터 화면과 차창 밖 풍경을 번갈아 보다 보니 뒤죽박죽이다.

사람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라, 영상이 우리 일상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지하철의 ‘디엠비(DMB)족’을 보고서부터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타면 휴대폰이나 디엠비 수신기를 이용해 ‘시청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좋아하는 영상을 보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디엠비족이 느는 것에 반비례해 책을 빼든 이들이나 신문 읽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한 나라 국민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의 총합이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총합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90년대 초반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형사 매드독>이란 영화가 있었다. 외로운 노총각 형사는 퇴근해 집에 오면 거실 소파에 앉아 잠들기 전까지 텔레비전만 본다. 맥주와 팝콘이 그의 유일한 친구다. 그와 연결된 세상은 오직 텔레비전 속의 영상뿐이다. 외로움, 단절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상세계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외롭고 불안한 탓에 영상이나 사이버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따라하는 것은 아닐까?

거리를 달리며, 책을 읽으며,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마주하는 세계는 영상세계보다 훨씬 풍성하다. 누군가 꾸며놓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무언가 모티브를 발견하는 이른바 ‘생얼’의 세계다. 어느 시인은 한 잡지에 ‘혼자 먹는 밥의 맛을 아는 사람은 육체노동자이거나 시인이다’라고 적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남들이 짜놓은 대로 보고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얼’의 세계와 고독하게 마주할 때 순수함과 독창성, 주체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사실 스포츠 경기 등을 시청하며 머리를 비우는 일을 나도 좋아한다. 드라마도 가끔 본다.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는 주말드라마는 꼭 본다. 그런데 최근 한 지인의 충고로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확 줄였다. 아이 교육을 위해 어른이건 아이건 시청시간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물론 덩달아 어른들에게도 시간이 많아졌다. 책 읽고, 운동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하루 중 ‘바보상자’ 보는 시간을 절반 또는 반의 반으로 줄여보길 권한다.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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