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기 절반을 채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때리기가 일부 서구 미디어 중심으로 거세게 일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것은 6월23일 미국의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 온라인판에 게재된 제이컵 하일브룬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왜 반기문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인가’라는 제하의 기고문이다.
하일브룬은 이 글에서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자리인데 반 총장이 그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인이라고 꼬집고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반 총장의 리더십 결여를 질타하고 있다. 기후변화, 국제 테러리즘, 금융위기, 핵 확산 방지, 아프간 재건, 스리랑카 내전, 수단 및 중동 사태 등 주요 현안 중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다룬 게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형편없는 영어실력,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 몸에 밴 관료적 타성, 그리고 약한 도덕적 설득력,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세계 지도자로서 자질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대목은 사무총장 집무실에 삼성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고급 자문관들에 한국인 친구들을 임명하는 등 ‘한국 주식회사’의 자회사 구실을 한 것을 제외하면 반 총장이 남긴 족적은 없다고 폄하하는 부분이다.
이쯤 되면 사실 왜곡을 넘어서 가학적 망동에 가깝다. 취임 즉시 기후변화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기후변화를 유엔의 주요 의제로 설정한 사람이 바로 반기문이다. 워싱턴과 런던의 G-20 정상회담에 참석해 빈국의 입장을 정열적으로 대변하고 나선 이도 반 총장이다.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테러리즘 문제에 반 총장이 나서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어 연설 잘하는 사람만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어야 하는가. 이건 영어지상주의의 오만이요 편견이다. 코피 아난과 같은 도덕적 설득력이 없다고? 세상이 웃을 이야기다. 가자, 쓰촨, 미얀마, 스리랑카 등 처참한 비극의 현장에서 반 총장이 보여준 고뇌하는 인간적 모습 이상 더 강한 도덕적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제왕적 총장이 되기를 거부하고 소리 없이, 합의에 기초한 밑으로부터의 유엔 개혁을 모색해 온 사람을 실패한 총장으로 낙인찍다니 해도 너무하다.
삼성 티브이 구입은 물론 자기가 거주하는 관저의 내부수리 하나 사무총장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오늘날 유엔의 현실이다. 그리고 뉴욕의 유엔 사무국 고위직에는 총장 비서실 차장으로 있는 김원수 대사가 유일하다. 오히려 분담금 규모에 비해 한국인이 역차별받고 있는 실정인데 한국인 독식이라니.
하일브룬이 왜 반 총장에게 각을 세우는 것일까. 그가 잘 알려진 골수 유대인 네오콘이라는 것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반 총장은 지난 1월 가자 사태 때 외국인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현지를 방문해 이스라엘의 만행을 규탄하고 책임자를 색출해 법적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정부에는 즉각적 일방 휴전을 요청했다. 전세계, 특히 아랍 사람들은 반 총장에게 전대미문의 찬사를 보냈다. 또한 지난 3월 미국 의회를 방문한 반 총장은 10억달러의 분담금을 아직도 미납한 미국을 ‘게으른 기부자’(deadbeat donor)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런 행보는 이스라엘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유엔 무용론을 펴는 하일브룬과 같은 네오콘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동요해서 안 된다. ‘힘없고 소리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편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반 총장에게 국민적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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