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7월을 맞는다. 2009년 대한민국은 온 나라를 경악게 한 ‘용산 참사’로 출발했고 온 국민을 허탈감에 익사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기록적인 사건들을 감당해야 했다. 무지막지의 경찰 진압으로 여섯명이 목숨을 잃은 사변으로 가장과 자식과 혈육을 잃은 유가족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는 5개월이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음이 웅변한다. 공권력과 용역들의 폭력적 처사에 치를 떨면서 외롭게 농성을 하고 있지만 철거민 가족들의 눈물은 국민들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검찰과 ‘나쁜 신문’들의 공조로 마침내 터트려진 전 대통령 서거는 조문객 500만명이라는 국민적 관심 속에 정의로운 인생관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큰 슬픔과 상처를 주었다. 철거민에서 대통령까지, 2009년에 뜬 해는 길기만 하고 저녁 하늘은 더욱 처연하다.
강자의 불공정에서 약자를 돌보는 것이 공권력의 소임이라면, 지상에 사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아 하늘에 전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격려와 희망으로 전해 주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종교는 ‘으뜸 된 가르침’ 즉 ‘절대 진리’를 의미한다. 세상 삶이 진리에 합일되도록 회개시키고 이끄는 것이 종교다. 좋은 정부는 국민 생활에 밀접해야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다. 성직자는 민초들이 겪는 고난과 슬픔에 함께해야 세상과 하늘 사이의 사제직 수행이 가능하다. 한국 가톨릭교회와 불교는 2009년 절망과 좌절의 현실에서 나름대로 시대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 끌어안음으로 시대적 소명에 깨어 있고자 노력했다. 불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국민들의 슬픔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고 가톨릭교회는 용산 참사로 통곡하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끌어안았다.
가톨릭 사제들은 아직도 진행중인 참사 현상을 찾아갔다. 주검이 실려나갔던 바로 그 자리에 제단을 차리고 유가족들과 함께 매일 저녁 7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들의 영혼과 유가족들에게서 눈물을 거두어 달라고 하느님께 탄원하고 있으니, 카인에게 억울하게 맞아 죽은 아벨의 제사로 받아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눈물로 호소하는 소수의 유가족들을 찾아 나선 사제들은 품격과 권위와 대접받는 성직자 모습을 버린 대신에 예수님에게는 아주 좋은 몫을 택한 것이다.
물론 아주 나쁜 선택으로 보는 자도 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현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들이 폭행당해 길거리에 내던져지고 옷이 찢어지고 팔순의 노사제를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모독하고 길바닥에 처박아 짓이기고 5일째 단식중인 신부의 팔을 비틀어 짓밟고 실신케 했다. 유신 정권과 5, 6공 때도 그랬지만 이건 패륜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뭘 몰라서 그렇지. 사제들은 정의를 위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긴다. 영적으로 깊어지는 순교의 영성이 그러하다. 가난하고 낮은 곳으로 육화한 사제들로 인하여 철거민들이 목숨을 빼앗겼던 빌딩은 골고타산으로 승화되었고 유가족은 십자가 아래 오열하는 예수의 어머니와 여인들이 되게 했다. 진실한 교회와 사제의 모습이다.
왜 대화하지 않는가? 아량은 강자가 먼저 보여야 한다. 철거민들을 법정에 세웠듯이 정부도 인정하고 사과하고 최소한 책임자 문책이 따라야 한다. 공평의 문제다. 그리고 속히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재개발의 이익을 서로 나누려 했다면 세입자 문제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탐욕의 종말은 늘 비극과 불행이 따른다.
오늘도 용산 참사 현장 7시 추모 미사가 봉헌된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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