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
“참 희한한 정보가 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변두리에 있는 단골 이발소 주인은 필자가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 인파 수가 조작됐다는 거였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만 해도 애도를 표하던 이 60대 이발사를 분노케 한 ‘희한한 정보’가 무얼까? 듣고 보니 희한할 것도 없는, 신문 보도 내용이었다. 한나라당 강연회에서 송대성 세종연구소장이 한 발언, 곧 “누가 덕수궁 담 옆에 의자를 놓고 4시간을 지켜봤더니 검은 옷 입은 한 사람이 5번을 돌더라”는 얘기를 어떤 이발 손님한테 전해들은 듯했다.
이발소 주인의 인식 변화는 대중이 선전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송 소장의 발언은 선전의 3대 원리인 단순화, 과장, 감정이입을 고루 갖추었다. ‘말 안 되는 말’이 선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이른바 ‘현저성 효과’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적으로 게을러서 모든 정보를 다 처리하지 않고 어떤 것이 지각적으로 특출하면 그에 따라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곤 한다. 뭔가 튀는 사람이 눈에 잘 들어오고, 그 사람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정치인과 학자들 중에도 튀는 말로 ‘나 여기 있음’을 알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독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온통 신문 지면과 방송을 장식하고 있다. 기자들은 독설가들의 홈페이지를 네티즌들 ‘성지순례’ 하듯 꼬박꼬박 방문해 그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킨다. 특히 ‘권위지’를 자처하는 보수신문들이 말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대서특필하는 것은 정파적 선전효과와 함께 상업주의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말 안 되는 말’의 진원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극우세력인 경우가 많지만, 이명박 정권 비판세력 중에도 증오에 찬 막말을 함으로써 비판의 이성적 기반을 스스로 허물고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살인마’ ‘개새끼’ ‘처단’ ‘척결’ 등 살벌한 말들이 좌우에서 쏟아진다.
단순화, 과장, 감정이입, 불온딱지 붙이기로 선전선동
“노동유연성은 최대과제” 등 대통령 말 모순 따져야
공론장 지키는 이 시대의 ‘비방지목’ 되려는 노력을
“이성은 필요 없다.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라.” “대중을 가장 빠르게 뭉치게 하는 것은 증오심이다.”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의 지침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한겨레>의 구실은 무엇이어야 할까? ‘말 안 되는 말’을 무시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외면하고, ‘공론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건전한 비판에 근거한다면 사회적 갈등은 소중한 것이다.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에는 갈등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갈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갈등은 의사소통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알게 해줘 친선회복이나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선동가들에게 악용되면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종종 있지도 않은 적을 만들어 마녀사냥을 하기도 한다. 이런 때 진정한 권위지라면 진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 근거 없는 선동인지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송대성 소장 발언만 해도 <한겨레>는 강연회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만 내보냈다.(6월5일치 2면) 현장칼럼이나 뉴스분석 등이 있었더라면 그런 말의 선전효과를 잠재우는 데 기여했으리라. 송 소장 말은 극단적인 단순화와 일반화의 오류를 동시에 범하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이 하루 5번 돌면 일주일에 35번 돌았다’는 식으로 ‘숫자의 마력’을 동원했다. 실제로 그렇게 돈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지만,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500만 조문객의 ‘500만분의 몇’일 따름이다. “지 에미 애비가 죽어도 그 짓을 하겠느냐”는 말은 전형적인 감정이입의 선동수법이다. ‘하루 5000대 버스’ 얘기도 일반 조문객 대부분이 전세버스가 아니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점을 고려하면 근거 없는 비난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경찰과 보수신문들이 화물연대 시위대가 사용한 만장 깃대를 ‘죽창’으로 부른 것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서 ‘불온딱지 붙이기’를 시도한 사례다. 깃대 1000개 중 20여개가 제작 과정에서 좀 비스듬하게 잘렸다는 건데, 해방 직후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죽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조차 ‘말 안 되는 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이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너무 공부에 시달리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고, “퇴임 뒤 녹색운동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5월6일치 5면) 아이들 앞에서 한 말이 거짓말이 안 되려면 일제고사를 강행하지 않는 등 정부 교육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더욱 의아한 것은 막강한 권한을 틀어쥔 재임 중에는 반환경적 사업들을 마구 추진하면서 퇴임 뒤엔 녹색운동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설마 재임 중에 시멘트로 싸 바른 4대강을 원래대로 복원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이명박 정부는 연초 50조원짜리 투자계획을 발표할 때도 ‘녹색 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정치권력의 야심과 경제권력의 이해타산을 감추는 ‘녹색 위장막’으로 활용되는 듯하다. 지난달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노동 유연성 문제는 연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는 말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임시직 비율 2위, 저임금 노동자 비중 1위, 공적 사회복지지출 꼴찌인 한국에서 노동 유연성을 더 확대하겠다니, 노동자에 대한 적대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노사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현대건설 경영인 경험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설문조사 관련 보도 등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한국에 대한 설문조사는 주요 응답자가 한국 기업 경영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일 뿐이다. 이런 대통령의 말들을 보도하면서 <한겨레>는 스트레이트 기사만 작게 내보내는 등 매우 소홀히 다루는 인상을 주었다. 5월8일치 ‘노동 유연성’ 기사를 예로 들면, ‘이 대통령 “노동유연성은 최우선 과제”’(5월8일치)라는 제목 아래 2면 2단으로 작게 다뤘다. 보수신문 중에서도 특히 경제지들이 환호하는 보도태도를 보인 반면, <경향>이 ‘비정규직 850만 현실 무시’란 큰 제목을 달아 1면 머리기사로 올린 게 대조적이었다. 일부 참모들도 모순된 말을 양산한다. 박형준 홍보기획관은 ‘민주주의 후퇴’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만큼 비판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방송작가의 인터넷 메일을 뒤져 정부를 비방한 글을 공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여론의 정치이다. 여론이 아무리 들끓어도 ‘쇠귀에 경 읽기’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언론자유가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소수의 목소리를 전달할 매체들이 고사 위기에 있어 공공의 접근권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 언론관련법(미디어법)이 통과되면 그것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사기>를 잠깐 인용하면, 중국 주나라 때 왕이 포악해 백성들이 왕을 비방했다가 왕이 그들을 죽이자 소공이 간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피해자가 대단히 많은 것처럼 백성들도 그러합니다.” 요임금은 대로에 ‘비방지목’(誹謗之木)이라는 팻말을 세워두고 자신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비방까지 적을 수 있게 했다. 한나라 효문제는 비방과 요언에 대한 죄목까지 없앴다.
언론의 자유는 ‘비방의 자유’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그 대상이 고위 공직자라면 더욱 그렇다. 인신공격은 삼가야겠지만, 비방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공론장’에서 절로 도태된다. <한겨레>가 시비곡직을 가리고 공론장을 지키는 이 시대의 ‘비방지목’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노동유연성은 최대과제” 등 대통령 말 모순 따져야
공론장 지키는 이 시대의 ‘비방지목’ 되려는 노력을
“이성은 필요 없다.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라.” “대중을 가장 빠르게 뭉치게 하는 것은 증오심이다.”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의 지침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한겨레>의 구실은 무엇이어야 할까? ‘말 안 되는 말’을 무시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외면하고, ‘공론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건전한 비판에 근거한다면 사회적 갈등은 소중한 것이다.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에는 갈등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갈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갈등은 의사소통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알게 해줘 친선회복이나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선동가들에게 악용되면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종종 있지도 않은 적을 만들어 마녀사냥을 하기도 한다. 이런 때 진정한 권위지라면 진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 근거 없는 선동인지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송대성 소장 발언만 해도 <한겨레>는 강연회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만 내보냈다.(6월5일치 2면) 현장칼럼이나 뉴스분석 등이 있었더라면 그런 말의 선전효과를 잠재우는 데 기여했으리라. 송 소장 말은 극단적인 단순화와 일반화의 오류를 동시에 범하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이 하루 5번 돌면 일주일에 35번 돌았다’는 식으로 ‘숫자의 마력’을 동원했다. 실제로 그렇게 돈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지만,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500만 조문객의 ‘500만분의 몇’일 따름이다. “지 에미 애비가 죽어도 그 짓을 하겠느냐”는 말은 전형적인 감정이입의 선동수법이다. ‘하루 5000대 버스’ 얘기도 일반 조문객 대부분이 전세버스가 아니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점을 고려하면 근거 없는 비난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경찰과 보수신문들이 화물연대 시위대가 사용한 만장 깃대를 ‘죽창’으로 부른 것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서 ‘불온딱지 붙이기’를 시도한 사례다. 깃대 1000개 중 20여개가 제작 과정에서 좀 비스듬하게 잘렸다는 건데, 해방 직후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죽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조차 ‘말 안 되는 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이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너무 공부에 시달리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고, “퇴임 뒤 녹색운동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5월6일치 5면) 아이들 앞에서 한 말이 거짓말이 안 되려면 일제고사를 강행하지 않는 등 정부 교육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더욱 의아한 것은 막강한 권한을 틀어쥔 재임 중에는 반환경적 사업들을 마구 추진하면서 퇴임 뒤엔 녹색운동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설마 재임 중에 시멘트로 싸 바른 4대강을 원래대로 복원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이명박 정부는 연초 50조원짜리 투자계획을 발표할 때도 ‘녹색 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정치권력의 야심과 경제권력의 이해타산을 감추는 ‘녹색 위장막’으로 활용되는 듯하다. 지난달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노동 유연성 문제는 연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는 말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임시직 비율 2위, 저임금 노동자 비중 1위, 공적 사회복지지출 꼴찌인 한국에서 노동 유연성을 더 확대하겠다니, 노동자에 대한 적대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노사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현대건설 경영인 경험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설문조사 관련 보도 등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한국에 대한 설문조사는 주요 응답자가 한국 기업 경영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일 뿐이다. 이런 대통령의 말들을 보도하면서 <한겨레>는 스트레이트 기사만 작게 내보내는 등 매우 소홀히 다루는 인상을 주었다. 5월8일치 ‘노동 유연성’ 기사를 예로 들면, ‘이 대통령 “노동유연성은 최우선 과제”’(5월8일치)라는 제목 아래 2면 2단으로 작게 다뤘다. 보수신문 중에서도 특히 경제지들이 환호하는 보도태도를 보인 반면, <경향>이 ‘비정규직 850만 현실 무시’란 큰 제목을 달아 1면 머리기사로 올린 게 대조적이었다. 일부 참모들도 모순된 말을 양산한다. 박형준 홍보기획관은 ‘민주주의 후퇴’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만큼 비판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방송작가의 인터넷 메일을 뒤져 정부를 비방한 글을 공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여론의 정치이다. 여론이 아무리 들끓어도 ‘쇠귀에 경 읽기’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언론자유가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소수의 목소리를 전달할 매체들이 고사 위기에 있어 공공의 접근권 자체가 위축되고 있다. 언론관련법(미디어법)이 통과되면 그것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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