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밤늦은 시각, 휴대폰으로 문자가 한 줄 날아들었다. “선생님,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주례를 맡아 결혼한 지 1년여밖에 안 되는 여제자가 보낸 밑도 끝도 없는 문장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문장 뒤에서 울고 있을 젊은 새댁의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부부싸움을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신랑의 말 한마디에 크게 다친 눈치였다.
나는 어두운 창밖을 보았다. 어둔 유리창에는 내가 결혼해 산 37년의 세월이 어릿어릿,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신혼 시절, 나는 사랑의 끝에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내가 젊은 날 통 크게 맹세했던 사랑의 말들을 나는 얼마큼 지켜왔고 얼마큼 버리며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사랑은 성찬이므로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의 입술과 마음속에는 주여, 우리는 높은 자가 아니오, 라는 말이 울려야 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을 처음 읽었던 스물 몇 살 때 나는 전율했다. 괜히 콧날이 시큰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내 속에 축적돼온 모든 갈망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이름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았었다. 그러나 새댁인 제자의 문자메시지를 받던 밤에 고백하건대, 나의 지난날들은 사랑의 갈망을 소진시키는 데 급급해왔을 뿐이며, 내가 그동안 고단하게 지켜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 역할속(束)으로서의 ‘아내’와 ‘자식’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헛헛하고 쓸쓸해졌다.
나는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 결국은 다분히 의례적인 답장을 보냈다. ‘나도 끝까지 안 가봐서 사랑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사랑이란 꿈꾸면서 가는 과정에 불과한 게 아닐까.’ 참으로 범속하고 비겁한, 자기합리화적인 대답이어서 나는 더욱 우울해졌다. 제자도 내 대답에 실망했는지 ‘사랑의 끝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서요’라는 말로 토를 달고 이후 침묵했다.
다음날의 아침 밥상 앞에서, 나는 늙어가는 아내에게 젊은 새댁과 간밤에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얘기를 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사랑의 끝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 아내는 망설이지 않고 명쾌한 목소리로 단번에 대답했다. “사랑의 끝엔 그야, 사랑이 있지!” 나는 놀라서 숟가락을 든 채 아내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정말이야? 진지하게 좀 생각하고 대답해봐!” “진지하게 열 번 생각해도 내 대답은 같다구요! 설령 당신이 날 배신하더라도, 애들이 날 싫어하더라도 난 그렇게 믿고 살 거야!”
그 순간 내 속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의 비명은 ‘아이구, 이 여자분한테 완전 졌네!’였다. 직장생활조차 해본 적 없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내한테 나는 완전히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작가’인 나보다 훨씬 더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었고 훨씬 더 당당했다. 나는 제자에게 전화로 아내의 말을 전하면서, 괜히 ‘단순무지하다’고 아내의 흉을 잔뜩 보았다. 그러나 며칠 후 찾아온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신랑하고 죽자고 싸운 끝에 주례인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었는데요, 선생님 대답에선 솔직히 아무 위로도 못 받았으나 사모님 대답을 듣곤 갑자기 힘이 막 생기더라구요. 신랑하고 화해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리 유명을 달리한 뒤 세상살이가 더 불안하고 팍팍해진 느낌이다. 북한 문제가 끼여 더욱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에 여러 번 눈시울을 닦았던 아내는, 그러나 여전히 씩씩하게 밥을 하고 수다를 떨고 채소를 다듬고 뉴스에 나오는 ‘나쁜놈들’에게 삿대질과 함께 욕을 한다. 아내의 세상은 어떤 이유로도 흔들리거나 망하는 법이 없다. 아내 같은 여자가 세상에 어디 아내뿐이겠는가.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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