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승 산업팀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가 치러진 날, 공교롭게도 삼성그룹의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있었다. 9년여를 끌어온 법적 공방에서 법원은 화끈하게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지만, 핵심인 경영권 승계 문제에선 완벽한 면죄부를 내줬다. 장례식 뉴스 말미에 판결 소식을 들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다시 노무현의 죽음이 떠올랐다.
“저의 집에서 한 일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앞두고 박연차씨한테서 돈을 받은 경위를 이렇게 고백했다. 자신은 뒤늦게 알았지만 ‘저의 집’ 일이니 법적 책임과 관계없이 면목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내와 자식의 돈거래를 일일이 챙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통령의 가족이라서 가능했던 일이기에 포괄적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검찰은 ‘아내가 받은 돈을 남편이 몰랐겠느냐’는 논리로 몰아붙였고, 고인은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듯 변명해야 하는 상황을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가기 정확히 1년 전, 이건희 전 삼성 회장도 특검에 소환돼 포토라인에 섰다. 그는 에버랜드 주식을 아들 재용씨에게 몰아준 경위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룹 지배권을 넘기는 일이 오너의 허락 없이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계열사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버텼다. 이 전 회장에 대한 검찰의 예우는 전직 대통령과는 사뭇 달랐다. ‘머슴이 한 일을 주인이 몰랐겠느냐’는 합리적 의심을 갖고 따져 묻지 않았다. 수차례 고발에도 폭탄 돌리기를 하다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애먼 계열사 사장들만 기소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특검이 나설 때까지, 이 전 회장을 직접 조사하지도 기소하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재벌 앞에서 거악에 맞선다는 검찰의 소명의식은 너무도 초라했다. 독점적인 기소권을 악용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조차 원천봉쇄했다. 박연차 사건 수사의 정당성을 존중해 달라는 검찰총장의 호소가 민망할 따름이다.
삼성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 경제정의의 수준을 가르는 상징적 잣대다. 형사처벌이 정답이란 얘기가 아니다. 반칙과 특권에 기대지 않는 정당한 게임의 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재벌들의 편법 대물림을 제어하기 힘든 허술한 법망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법원은 삼성 사건을 배임이냐 아니냐는 허무한 법리 논란으로 축소시켜, 사회적 합의라는 더 큰 역사적 책무를 외면했다. 법원 안에서 적잖은 소수 의견이 있었고 일부 유죄 판단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론을 의식한 알리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 대표적인 경제 권력이 그의 장례식 날 면죄부를 받은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젠 재벌들이 비상장 계열사를 이용해 세금 없이 부를 세습하는 건 온전히 그들의 도덕성에 맡겨졌다. 부당하다고 말할 순 있지만, 불법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정의로운 판결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정의로운 판결을 추구한다는 것은, 판결에 이르는 과정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예비 판검사들이 배우는 ‘사법 정의’의 개념 중 하나다. 많은 국민들이 검찰과 법원에 대한 신뢰를 거두는 이유는, 단지 수사와 재판의 결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이들이 믿고 있는 상식과 진실이 법의 논리로 배척될 때, 사법 정의는 그들만의 정의에 머물 뿐이다.
김회승 산업팀 기자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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