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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닭고기와 신인류

등록 2005-05-22 17:28수정 2005-05-22 17:28

이인우 사회부 기자
이인우 사회부 기자
아침 밥상 옆에서 광고전단지를 훑어보던 아내가 말했다. 어휴, 닭고기값이 또 올랐네.

아내는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사이엔 엄연히 계급이 있다고 보는 축이다. 만약 서민들이 돼지고기 한근 값을 가지고 닭고기를 마음놓고 살 수 없게 된다면 정말 화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쇠고기는 엄두를 낼 수 없고 돼지고기도 망설여지는 가계의 주부들에게 닭고기는 일종의 심리적 ‘조커’이다. 저녁엔 삼겹살 파티라도 해야지 하며 시장에 갔다가 그만 모자라는 돈 때문에 닭볶음탕으로 마음을 바꾸는 경험을 얼마나 많은 주부들이 하고 있는가. 어쨌든 닭고기 정도는 마음 편히 먹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라며 10대 초반의 두 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눈길이 왠지 무서워 그게 그렇게 올랐어? 라고 남말 하듯 꽁무니빼고 출근한 게 달포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난 15일 정말로 닭고기값, 정확히 말해 산지 닭값이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슬금슬금 계속 오르고 있었다는 이야긴데, 이런 추세는 여름이 지날 때까지 쉽게 꺾이지 않을 듯하다고 한다.

서민들에게 닭고기는 중요한 단백질공급원이다. 프랑스에는 17세기 초의 명군 앙리 4세가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해 닭을 대량으로 사육해 고기를 공급해 칭송을 받았다는 역사가 전해진다. 인권혁명을 일으킨 프랑스인들이 앙리 4세의 위민정신을 기려 닭을 나라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서민들의 정서는 이처럼 단순솔직하다. 어린 자식들의 먹거리가 위협받는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는 법이다. 아내가 ‘먹어야’가 아니라 ‘먹일 수 있어야’라는 어법을 구사한 것은 일부러 꾸민 수사가 아니라 모성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해방구, 대학에 가 보면 닭고기값 걱정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결과물’을 목격할 수도 있다. 확연히 달라진 일부 학생들의 체형을 실감할 때가 그렇다. 봄축제가 한창이던 지난주 이화여대 교정을 거닐어 보았는데, 큰 키에 긴 팔다리와 작은 머리를 가진 여대생들의 당당한 워킹은 서구의 여느 캠퍼스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마치 중년의 나로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무리에 잘못 들어온 네안데르탈인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조사 결과를 보면, 25년 전인 1979년 우리나라 20대 남녀의 평균 키는 미국인에 비해 10㎝ 이상 작았으나, 2004년 남자는 5.3㎝, 여자는 5.5㎝ 작아 신장 차이가 크게 좁혀졌다.)

체형의 서구화는 경제성장에 따른 영양상태의 향상이 주원인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먹거리를 비롯한 생활물가는 서민들의 체온계와 같다. 적당하면 공기처럼 의식하지 못하지만 너무 오르면 보통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만든다.(지난 4월 생활물가 상승률은 최근 4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정부 당국은 물가 문제를 너무 제쳐놓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볼 때다. 생뚱맞은 기우로만 치부하지 말고, 계층 간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정치적 표출일 수 있다는 쪽으로도 상상력을 발휘해 보길 권하고 싶다.


하여튼 박봉의 월급쟁이 가장의 한사람으로서 기자도 날잡아 생닭 두마리 사들고 들어가 직접 닭볶음탕을 요리해 보겠다. 그리고 닭고기로 꽉 찬 배를 두드리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 보겠다. 여봐,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걱정이라면 즐겁게 하자고. 우리 집에도 신인류가 2명이나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이인우 사회부 기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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