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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 황현산

등록 2009-05-22 21:40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삶의창
벌써 오래된 이야기고, 따라서 그만큼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초·중·고생들의 ‘웃기는 답안지’가 이런저런 인터넷 사이트에 떠돈 적이 있다. 질문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여 엉뚱한 답을 쓰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희극적인 효과를 얻게 된 답안지들이다. 그 가운데서 어느 초등학교 일학년 학생의 답안지는 그저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어떤 것을 담고 있다.

황소가 손에 거울을 들고 제 얼굴을 비춰 보는 그림 아래 “황소가 □□□ 봅니다”라고 적혀 있다. 문제는 이 네모 칸을 채워 넣는 것이고, 정답은 물론 ‘거울을’이다. 그런데 어린 학생은 “미쳤나”라고 썼다. 이 답은 문제를 낸 선생의 의도와 동떨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학생은 문제의 조건에 어긋나지 않게 적절한 문장을 만들어 내었다. ‘미쳤나’를 쓸 수 있는 학생이 ‘거울을’을 쓰지 못할 리가 없으며, 그가 그림 속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 어린 학생은 동사 ‘보다’의 용법을 폭넓게 알고 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야속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학생은 다만 어른들이 기대하는 ‘동심의 유희’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거기 참여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이 그에게 불이익을 주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비슷한 경우가 하나 더 있다. 유아용 학습지 업체에서는 방문교사들을 내보내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들의 적성이나 학습능력을 무료로 검사해 준다. 학습지 판로를 개척하는 한 방법이다. 내가 아는 어느 젊은 엄마가 이 방문교사들을 맞아들여 네 살 난 아이의 능력을 검사하게 했다. 아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그 내용을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알아내는 시험이다. 아이는 시험지옥의 첫 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엄마는 오히려 아이를 대견하게 여겼다. 그 실상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고, 요구하는 답은 그 모자 쓴 사람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벌써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간단한 셈도 곧잘 해내는 이 아이가 모자 쓴 사람을 못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이렇게 반문하는 아이의 생각은 질문자들의 요구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지만, 방문교사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높이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또는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틀림없이 외국의 학습지에서 번역했을 저 질문의 말 자체에 있다. 방문교사는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거나, 최소한 “누가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고 물었어야 한다.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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