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삶의창
오래전 쓴 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엔 늙어가는 아버지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어금니 하나를 손으로 잡아당겨 빼내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원인 모를 병환으로 몸무게가 많이 빠지고 거동도 불편했던 시절의 아버지 이야기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빼낸 이를 든 채 아버지가 당황해하면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글쎄, 이것이 그냥 … 쑥 빠지는구나 ….”
단단한 이가 이럴진대 다른 건 말해 무엇하랴. 묵은 것들은 뭐든지 시간의 부식을 이기지 못하고 제 숙주로부터 쑥 빠져나온다. 대못이 벽에서 ‘쑥’ 빠져나오고 전자제품 스위치가 ‘쑥’ 빠져나오고 또 어떤 날은 낡은 의자 받침대가 ‘쑥’ 빠져나온다. 머리칼이 한 옹큼씩 빠져나오고 손톱과 발톱, 심지어 갈빗대나 다리뼈도 쉽게 빠져나와 문제를 일으킨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야 할 정액조차 그냥 쑤욱, 미끄러져 빠져나가고 마는 경험은 사멸로 가는 하강길에서 누구나 만나는 일반적인 경험이다.
빠져나온 건 곧 ‘쓱’ 사라진다. 가령 아버지의 어금니는 지붕으로 던져져 하늘로 ‘쓱’ 사라지고 전자제품 스위치는 쓰레기통으로 ‘쓱’ 사라지고 손톱과 발톱과 다리뼈는 이윽고 땅속으로 ‘쓱’ 사라진다. ‘쑥’ 빠져나오는 것은 곧 ‘쑤욱’이 되었다가, 가속도가 붙으며 ‘쑤욱, 쑤욱, 쑤욱 …’이 되고 ‘쓱’ 사라지던 것들은 ‘쓰윽, 쓰윽, 쓰윽 …’이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티베트에선 5원소를 사람의 목숨으로 본다. 하나는 흙이니 살(肉)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물이니 체액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불이니 체열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허공이니 숨구멍이나 몸 안의 빈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바람이니, 들숨과 날숨과 방귀와 재채기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건강한 것은 이 5원소가 균형 잡힌 악력으로 서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이며, 이 악력이 약해지면 병이 들고, 이 악력이 완전 해체되면 죽음이다.
사람의 몸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의 정신도 그러하고 한 사회도 그러하고 우주도 그러하다고 티베트는 가르친다. 이를테면 ‘흙’은 기반이고 ‘불’은 열정이고 ‘물’은 모성과 같은 관용이고 ‘허공’은 길이고 ‘바람’은 역동적인 숨일 터이다. 음양오행이라는 것 또한 이런 이치와 다르지 않다.
욕망은 물론 ‘불’이다. 계속 타오르기만 하는 불은 자기 자신의 ‘물’과 ‘허공’과 ‘바람’부터 태우기 쉽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그 균형을 맞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니 문제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 예컨대 돈과 권력과 지식도 오래되면 ‘쑤욱’ 빠져나가서 ‘쓰윽’ 사라진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당신의 어금니가 쑥 빠지거든 돈으로 이를 만들어 심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날마다 밤마다 속삭인다. 그러니 쉬지 말고 전투를 수행하듯 돈을 벌어 권력도 사고 지식도 사고 사랑도 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다. 이제 곧 가속이 붙을 ‘쑤욱, 쑤욱, 쑤욱 …’은 그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의 몸은 어쨌든 세상으로부터 ‘쑤욱’ 빠져나가 ‘쓰윽’ 사라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권력과 지식도 마찬가지 길을 걸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파른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때로는 쉬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멈출 수 있는 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안다. 물이 부족하면 물을 줄 일이고 허공이 부족하면 허공을 넓힐 일이다.
나는 누구보다 지도층 사람들이 좀 쉬면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계는 물론 문화계 사람들조차 너무 일을 많이 하려고 해서 보는 이의 세상살이까지 때로는 팍팍해진다. 당신은 혹시 당신의 벽으로부터 어느 날 쑤욱 빠져나오는 대못이 아니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당신이 악착같이 붙들고자 하는 그 벽은 어떤 벽인가.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나는 누구보다 지도층 사람들이 좀 쉬면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계는 물론 문화계 사람들조차 너무 일을 많이 하려고 해서 보는 이의 세상살이까지 때로는 팍팍해진다. 당신은 혹시 당신의 벽으로부터 어느 날 쑤욱 빠져나오는 대못이 아니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당신이 악착같이 붙들고자 하는 그 벽은 어떤 벽인가.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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