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삶의창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청소년의 날, … 가정의 달로 기념한다. 가족들과 모여 이런 작업을 해보는 건 어떨까?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가정하고 각자가 기억하는 전화번호를 적어보자. 몇 개 정도를 기억할 수 있는가? 필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다. 휴대전화 번호들은 거의 알 수 없었고, 기억되는 번호조차도 옛날부터 자주 눌렀던 유선전화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는 번호들뿐이었다.
각종 휴대전화 기능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비로울 뿐이다. 사람들은 첨단기술을 대하면서 인간이란 참으로 위대하며 그 능력은 날로 진보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란 의지하는 만큼 퇴보하는 존재다. 필자는 사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유선 통신병으로 근무했는데 사령부 내 900여개의 공전식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일했다. 특별히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근무 시작하고 서너 달만 지나면 누구나 다 그랬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기억력의 노화 때문만일까? 휴대전화 메모리를 누르기만 하면 걸리는 통화 습관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 8킬로미터 떨어진 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읍내 장날이면 같은 길을 가시는 할머니들은 머리에 장짐을 이고서 우리 걸음을 앞질러 가시곤 했다. 그때는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았다. 중학교 1년생의 한 시간 걸음이 8킬로였지만 이제는 국군 장정도 그렇게 가지 못할 것이다. 불과 수십년 만에 ….
대부분의 종교 경전들은 기록도 없던 시대의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다. 수천 가지 민간 치료요법과 약제기술들이 스승과 제자에게 기억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늘 사용하는 전화번호마저 기억할 수 없다. 지식검색창과 저장된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은 기억도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뇌와 육신이 그렇게 퇴화해 가고 있다. 피라미드·만리장성 등 문화유산을 보면서 불가사의라 감탄하지만, 인간이 끝없이 퇴화해 왔을 뿐 고대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건축기술이었을 따름이다.
기술상품은 한없이 업그레이드되고 상용화되어 나를 맞이한다. 대단히 편리하다. 그러나 기술제품들이란 사람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퇴화로 이끈다. 마침내는 플러그가 뽑히듯 정지되고 불위무용의 순간을 맞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삶을 만들지만, 삶도 사람을 형상화시킨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명제가 되는 것이니, 진정 진화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이토록 퇴화하는 시대에 세계 최고의 천재 교육인들 도대체 무엇에 쓰겠는가? 연전에 일본의 한 공동체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초·중·고등 종합학교인데 전교생이 수십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의 정규 사립학교 중 가장 작은 학교다. 그 학교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주산 암산 수업을 정규화하고 휴식시간에는 운동장에서 외발자전거를 타게 한다. 교장은 좌뇌와 우뇌의 통합적 작용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시대가 제공하는 환경에 대한 대안의 삶을 궁리하는 것은 늘 중요하다. 아이티(IT) 시대에는 야성이 사람을 만든다. 삶의 진정한 능력과 진보는 자발적인 불편함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자발적인 불편함이 현대의 청빈이며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작은 삶이다. 가족들과 모여 한 가지의 불편함을 선택해 보는 작업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 가정의 달에 내리는 축복이 될 것이다.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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