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남미의 빈국 파라과이가 최근 대통령의 숨겨둔 자식 문제로 시끄럽다. 주교 출신인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의 아이를 낳았다는 여성이 세 명이나 등장했다.
첫번째 여성이 두살배기 아들의 아버지로 대통령을 지목하고 친자 확인소송을 냈다. 침묵을 지키던 대통령은 닷새 만에 ‘그래, 내가 아버지 맞다’고 깨끗이 인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범상치 않은 ‘러브스토리’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사제복을 벗은 57살 독신남과 26살 미혼모의 성속을 뛰어넘는 사랑.
아이 엄마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이 아빠가 ‘사제복 벗고 아이 여럿 낳아 행복하게 살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선 ‘그래, 사제로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제 속인이 되어서 이루려고 하는 거야’ 하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 스쳤다. 다만, 이 여성이 대통령과 처음 관계를 맺은 때가 16살로 미성년이었다는 게 좀 걸리긴 했다.
일주일 뒤, 두번째 여성이 나타났다. 일곱살짜리 아들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했다. 10년 전인 17살 때부터 당시 주교였던 대통령과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번째 여성이 등장했다. 16개월 된 아들과 함께였다. 급기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용서를 빈 그는 “변화를 위한 계획이 영향 받아서는 안 된다”고 사임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빈자의 아버지’ ‘빨간 주교’, 루고 대통령의 별칭이었다. 주교로서 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좌파 신부’로서 빈민 지역에서 왕성한 사목활동을 벌였다. 1년 전 대선에선 60년 장기 집권을 종식한 돌풍의 주역이 됐다. ‘갱과 나치 전범의 천국’ 파라과이를 현대적이고 민주화된 나라로 만들겠다며 ‘변화’를 외쳤다. 남미판 버락 오바마란 말도 들었다. 지난주 워싱턴 방문도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자식 논란이 불거지면서 취소됐다.
로마 가톨릭이 수년 전부터 이 ‘탕아’의 비행을 알고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4년 전 최소 두 명의 여성이 바티칸에 루고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제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티칸은 이런 사실을 들추지 않은 채 지난해 4월 루고의 요청에 따라 그의 사제직 사임을 승인했다는 이야기다.
성직자이자 좌파 개혁가로 살아온 이 파라과이 대통령의 소아애병적인 취향(일명 롤리타콤플렉스)은 참 아이러니하다.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엄격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 범죄에 가까운 사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루고 대통령에 비하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이쯤 되면 루고 대통령이 진짜 ‘빈자’의 아버지가 맞다는 농담도 나올 법하다.
성직자와 국가원수라는 가장 고상한 간판을 동시에 가진 이의 ‘문제적 일탈’을 보면서 종교와 정치라는 고전적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성직자로 평생을 살기엔 너무 외로웠을까? 빈민 대중들 앞에 서면 설수록 내적으론 더한 고독감이 몰려왔을까? 숨겨 놓은 자식이 셋뿐일까? 그럼 다른 성직자, 다른 정치인들은 ….
어찌 보면 루고 대통령은 오히려 순진한 쪽인지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종교와 정치의 ‘속살’을 어설픈 그가 살짝 들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머나먼 남미의 일이지만, 남의 일 같지 않은 게 요즘 세태다.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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