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학고재 주간
증조부 기제사에 ‘돔배기’를 올리자 제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골이 아니고 서울에서 차린 제사상에, 게다가 까무룩 잊었던 제수가 나왔으니 놀람은 당연했다. 종부가 별걸 기억한다느니, 용케 구했다느니 하는 덕담이 참례에 앞서 오가는 바람에 고향에서 제사 지내던 풍정이 모처럼 되살아난 듯했다. 돔배기 하나에 말참견이 요란한 건 집안 내림이다. 거기에 조금 고린 사연이 숨어 있다.
돔배기는 토막 내서 염장한 상어고기다. 동해안에서 잡힌 고등어나 상어는 경북 내륙으로 옮겨지며 소금 간을 한다. 그게 ‘안동 간고등어’가 되고 ‘영천 돔배기’가 된다. 돔배기는 단백질이 많고 지방이 적어 다이어트식으로 좋다고 집산지 영천에서는 자랑이 넘친다. 어린 시절 기억에 경상도 제삿날의 돔배기는 전라도 잔칫날의 홍어에 못잖은 품목이었다. 제수용 돔배기는 찌거나 조려서 꼬치로 올렸다. 운두가 넓은 제기에 촘촘하게 꿴 돔배기가 떡하니 자리 잡으면 곧 분향하고 강신례에 들어가겠구나 알아차렸다.
경상도라도 집집이 돔배기를 올리진 않는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중기 시인의 시집을 봤더니 돔배기를 소재로 쓴 해학적인 시 하나가 있었다. 영천 사람이 타관 사람과 묘소에서 말다툼하는데, “돔배기가 상놈 고기면 쇠고기 산적이 양반 고기냐” 하며 삿대질하는 대목이 나온다. 돔배기를 하대하는 집안도 있다. ‘가례는 가가례’라는 말처럼 뱀뱀이와 씀씀이에 따라 ‘돔배기 예법’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우리 집 가례는 유난했다. 기제사든 명절 제사든 돔배기는 빠지지 않는 감초였다. 아니, 감초는 틀린 비유다. 돔배기가 소태맛이었다. 짜다 못해 진저리나는 그 절고 전 맛, 그것이 우리 집 돔배기였다. 왜 그랬는지 안다. 자린고비네 굴비보다 더 짜야 적게 먹고 오래 먹었기 때문이다. 돔배기 반 토막으로 삼시 세 끼를 때웠다. 윗대 한 분이 생전에 돔배기 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것이 대를 이어 돔배기가 제상에 오른 이유라는 얘기는 장성해서 들었다. 가신 이가 사는 이의 식성을 정해주는 가문이었다.
철상하고 난 뒤 제관들이 빙 둘러앉아 칭찬받은 종부의 제수를 음복했다. 조리고 찐 돔배기가 향긋한 냄새를 피웠다. 옛날 돔배기가 아님은 살결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돔배기는 찌고 나서도 고혹적인 유백색이다. 그 시절의 돔배기는 썩은 짚단처럼 파삭한데다 오줌에 절인 누런색을 하고 있었다. 한입 덥석 물었더니 담백한 육질이 부드럽게 감치면서 고소한 맛을 서둘러 허락한다. 무엇보다 짠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짜디짠 돔배기의 기억을 상큼하게 배신하는 감칠맛, 이 맛의 정체가 뭘까. 어쭙잖게도 내 견뎌온 세월의 보답이려니 자위하려는데 숙부께서 한 말씀 거든다. 해방 전에 맛본 음식 하나가 느닷없이 생각났단다. 열 살이 채 안 된 숙부가 가형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갔다. 사무라이 영화였는데 주인공이 복수의 한판을 벌이려는 순간 극장의 불이 꺼졌다. 공습 대비 훈련이라며 관객 모두 나가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졸지에 쫓겨난 숙부가 씩씩거리자 형이 근처 가게로 데려갔다. 형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젠자이(일본 단팥죽)를 사줬다. “한입 떠먹는데 이런 단맛이 세상에 있었나 싶더군.”
손철주/학고재 주간
숙부는 말 나온 김에 아랫대를 가르칠 모양이었다. “다들 짠 음식 먹으며 먹을거리를 절약하던 시절이었어. 단팥죽 맛이 그래서 더 달았는지 몰라.” 숙부 말씀을 다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는 집에 돌아가 혀에 남은 단맛을 다시며 단꿈을 꾸었단다. 그리고 밤중에 어른이 깨워 일어났다. 그날도 돔배기가 나오는 제삿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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