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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버릴 것과 가질 것 / 박범신

등록 2009-04-17 21:59수정 2009-04-18 00:54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삶의창
낡은 보일러 관을 가느라 집 안이 엉망이다.

내 방 서가 뒤쪽에서 거의 쓰지 않은 컴퓨터용 프린트 용지가 두 박스나 나온다. 쓰다가 어디 박아뒀는지 잊고 또 사서 쓰고, 다시 사서 쓰고 하면서 버려둔 것이다. 서랍장에선 요즘은 사용하지도 않는 만년필이 열 개가 넘게 쏟아진다. 모두 제법 값이 나가는 만년필이다.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외국여행 중에 내가 직접 산 것도 있다. 만년필을 사용해본 기억이 까마득한데, 쓰지도 않으면서 왜 그리 욕심을 냈는지 모르겠다.

서재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결혼해 이제는 품을 떠난 아이들 방에선 예전에 쓰던 컴퓨터 본체와 프린터만 해도 여러 개가 나온다. 연필이나 볼펜 등 필기구는 와이셔츠 상자로 한 상자는 됨직하다. 장롱엔 셔츠나 라벨을 뜯지도 않은 야구모자 따위가 가득 쌓여 있고, 책꽂이에선 쓰지도 않은 앨범, 스케치북이 연달아 쏟아진다.

‘아이구, 이게 다 내 돈이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괜찮은 티셔츠 하나를 사려면 내가 원고를 최소한 열 장은 써야 한다. 말이 열 장이지, 어떤 때는 원고지 열 장을 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비장하게 밤을 새우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번 ‘내 돈’으로 산 것들이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버려져 있으니 울화가 절로 난다. 생활용품들이니 보나마나 아이들은 이런 것들은 다시 새것으로 사서 쓰고 있을 것이다.

일꾼이 책상을 부순다. 내부공사를 하면서 오래되어 상판이 휘어 주저앉은 책상을 바꿀 수밖에 없어 그걸 버리라고 했더니, 버리기 쉽게 한다고 대뜸 망치질이다. 휘어진 책상의 상판이 망치질에 두 조각 나는 순간 마치 내 허리가 조각나는 것처럼 아프다. 오래 쓴 책상이다. 내가 쓴 소설의 3분지 2는 아마 그 책상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원고를 쓰다 말고 지쳐 거기에 엎드려 잠든 적도 많다. 그 책상으로 작가의 외길을 멈추지 않고 갔고, 그 책상으로 아이들 셋을 먹이고 가르쳤으며, 그 책상으로 지금 고치고 있는 이 집도 지었는데, 망치질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끝장나고 만다. 내 삶의 정체성과 내 삶의 가장 뜨거웠던 추억들도 ‘책상의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쓴 소설 중에 <더러운 책상>이 있다.

글쓰기를 지향하는 한 청년의 내적 분열을 다룬 소설인데, 그 소설에서 가리키는 ‘더러운 책상’은 오래 쓴 낡은 책상이 아니다. ‘더러운 책상’은 그 책상에서 공부하고 배운 것을 오직 개인의 영달과 소비적인 자본주의 안락에 매진하고자 사용하는 경우의 책상이다. 어떤 이의 책상은 낡았어도 깨끗하고 어떤 이의 책상은 비록 새것일지라도 더럽다. 내 책상은 더러운 책상이었을까, 깨끗한 책상이었을까.

소비는 미덕이 아니다. 오늘날의 소비생활은 소비한다기보다 트렌드네 뭐네 하면서, 기실 버리고 사는 짓의 어리석은 반복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소비를 부추기는데, 알고 보면 갖가지 명목을 내세워 맹목적 낭비를 강요하고 있다. 내 젊은 날 뼈가 되고 살이 됐던 ‘석유 한 방울 피 한 방울’이라는 식의 표어는 여전히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지만 사어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 세대와 달리 오늘의 과잉소비는 죄의식도 없다. 지금의 ‘불황’이라는 것도 혹시 과잉 소비를 전제하고 하는 말은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든다.

부서진 소쿠리를 마른 그릇으로 재사용하려고 비료포대 종이로 예쁘게 바르던, 또 몽당연필을 못 쓰는 붓뚜껑에 박아주던 어머니가 그립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는 진실로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있었으나, 대학까지 보낸 내 아이들에게 나는 그것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또래 아이들로서는 우리 아이들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지만)는 자책이 가슴을 치는 ‘불황’의 봄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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