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삶의창
첨예한 대립 끝에 국회에서 이른바 ‘미디어 육성법’의 강행처리가 일단 연기되었다. 문제가 많지만, 어쨌든 당장의 파국을 면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여당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법안 추진이 시민들과 야당의 저항 때문에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을 두고 다수결을 존중해야 할 대의제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설마 진심으로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 자신이 야당이었을 때,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개정안을 무참히 좌절시켰던 저 극렬한 반대투쟁은 무엇이었던가?
사실, 따져보면 문제의 뿌리는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에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위기상황은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가 배타적인 이익추구에 골몰하면서 공생의 논리를 망각한 결과임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틀이 과연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적합한 제도인가 하는 것이다. 지역과 역사와 전통에 따른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에 이바지하기보다는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사실상의 독재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득권층이 여론에 대한 지배·조작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를 통한 민심의 반영이 언제나 왜곡될 수밖에 없는 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폐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일 것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 의회는 1985년에 원자력 에너지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결정했는데, 사실 오늘의 경제논리로 미뤄 볼 때, 어느 나라든지 의회가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덴마크에서 그게 가능했던 것은 시민들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적 정치참여가 활발했던 탓이다. 덴마크에서는 중대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시민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합의에 이르는 관행이 ‘시민합의회의’라는 이름으로 지난 수십년 계속돼 왔다. 흥미로운 것은 원자력 문제를 다룰 때 시민들은 단순히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수준을 넘어서 ‘풍요로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좀더 철학적인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말 풍요로운 삶이란 결코 에너지를 풍부하게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의회는 그러한 시민들의 결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덴마크의 경우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한 사회가 얼마나 지성적이고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은 한국에서도 덴마크의 것과 비슷한 ‘시민합의회의’가 원자력과 생명윤리 문제를 놓고 두어 차례 열린 적이 있다. 그러나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언론들도 이 자발적인 ‘시민합의회의’를 외면함으로써 모처럼의 소중한 실험이 무산되었다.
이번 국회의 성과라면 여야가 미디어법 상정 이전에 ‘사회적 논의기구’를 통한 토론의 필요성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비록 정략적인 타협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활용하여 ‘시민합의회의’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국회 논의와는 별도로 시민들 자신의 능동적 참가에 의한 토론의 장이 전국 곳곳에서 활발하게 열려 민중의 뜻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선진화된 민주주의 사회를 원한다면, 어떠한 정파도, 어떠한 사회세력도 이 열린 토론을 장려하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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