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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갈망이 깊어지는 사회 / 박범신

등록 2009-02-20 20:37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삶의창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거대한 탑처럼 솟아오른 산이 사람들의 마을로 기우뚱하고 무너져 내리는 꿈이었다. 잠을 깨고 한참이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무엇이라고 딱 잡아 말하긴 어려우나, 요즘은 자꾸 조금씩 목이 졸리는 느낌이다. 용산 철거민 참사의 전말도 그렇고, 성적지상주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제고사 파동도 그렇고, 연일 보도되는 살인사건도 그렇고, 몇몇 법률안 입법을 둘러싼 설왕설래도 그렇다. 성격이 예민해서 그런지, 이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밀하게 한통속으로 맺어져 나 같은 사람의 꿈자리까지 쫓아와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다. 목이 졸리는 듯한 이런 언짢은 느낌이 과연 나만 드는 것일까.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려는 이들의 긴 행렬을 보면서도, 내겐 그분의 고귀한 삶이 먼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타고 있는 어떤 갈망의 불꽃이 먼저 보인다. 그 행렬이 보여주는 것은 우선은 진실하고 따뜻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일 것이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식으로 계속 살 수는 없다는,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일 것이다. 일찍이 붓다는 말한 바 있다.

“당신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오로지 헌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티베트에선 수행자가 더 드높은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 스승의 매개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적 스승은 해와 달 같은 존재로서 그가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고, 이로써 번뇌의 바다가 단번에 잠잠해질 테니, 이 평안은 곧 갈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것을 ‘모귀’라고 부른다. 모귀는 ‘갈망과 존경’이라는 뜻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조문 행렬은,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갈망과 존경을 바칠 참스승이 별로 없다는 비극적 사실을 반증하는 한편,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갈망에의 분출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참스승이 드물다는 것은 불행이요, 참스승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깊다는 것은 큰 희망이다.

티베트의 영적 스승들은 지혜의 도구로서, 첫째 귀 기울여 듣고, 둘째 깊은 이해심으로 끊임없이 성찰할 것이며, 셋째 명상을 통해 얻은 통찰을 삶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세 가지 도구를 통해야 비로소 지혜로운 인간에 이를 수 있으며, 이것으로써 마침내 삶의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켜내 고요한 바다 같은 참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옳거니, 내 꿈자리가 요즘 뒤숭숭한 것은 이 세 가지 지혜의 도구들로부터 우리 사회가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거나, 멀어지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도그룹부터 남의 말은 무조건 적의 비방으로 간주하여 들을 줄 모르고, 이로써 보통사람들도 성찰할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불철주야 남보다 높아지자 하여 모든 이가 이미 오래전 명상하는 법을 잃었으니, 어찌 나 혼자의 꿈자리인들 잔잔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긴 조문 행렬이 시사해주는바, 우리에게 이처럼 갈망이 깊다면 희망이 또한 그만큼 깊다는 뜻일 터이다. 갈망이란, 그것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보면 매우 역동적인 감성이다. 개인의 그것이 그런 것처럼, 한 사회의 카르마(業) 또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역동적으로 창조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필요한 것은 갈망을 관 속에 넣지 말고 계속 살아 있게 하여 그것을 모두 힘있게 따라가는 일이다.

저기, 갈망의 행렬 뒤에 새 역사의 봄이 따라오고 있다. 나는 그리 믿고 싶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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