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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진보가 답답하다 / 박찬수

등록 2009-02-09 18:43수정 2009-02-09 19:32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공교롭게도 검찰의 용산 참사 수사 결과 발표가 있는 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물론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행돼 온 두 사건이 이렇게 만난 건 의미심장하다. 지금 진보 진영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는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정권의 위기를 예시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심각한 경제난 속에 사회적 갈등은 더 심해질 거고, 용산 참사에서 드러나듯 현정권의 대응 양식은 더 큰 충돌과 비극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집권세력은 어려움을 제대로 헤쳐나갈 만한 응집력과 기획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엠비(MB) 입법’의 강행 처리에 실패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명박 정권은 내부 이견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취약하다. 때론 잘못된 방향보다 지지부진함과 무기력이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럴 때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터졌다. 민주노총 게시판에 들어가 봤더니, 올라온 글의 절반은 내부 비판이지만, 절반가량은 ‘강간노총 자폭하라’는 식의 일방적 매도였다. 보수세력으로선 진보 진영의 부도덕성을 역공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했다.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명박 정부와 싸워야 하는데, 이런 사건이 조·중·동에 대서특필되면 민주노총이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성폭력 사건 직후 민주노총 간부들이 피해자에게 했다는 얘기)는 식의 ‘전략적 판단’ 때문은 아니다. ‘진보 단체 도덕성이 어쩌다 이렇게 땅에 떨어졌을까’ 하는 자괴감 탓도 아니었다. 솔직히 성폭력이 어디 진보·보수를 가려서 발생하는 건가. 인간의 선악이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더 높은 도덕성을 보여야 하는 진보 단체에서 …’라는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혼란스러웠던 건, 도대체 지금 시점에서 본질적인 게 이명박 정권의 위기인가, 아니면 그 대척점에 선 진보 진영의 위기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무수한 오류를 비판하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보 진영이 힘을 얻고, 다시 살아나고, 전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지율은 추락하는데 그게 민주당이나 다른 진보 정당의 외연 확대로 귀결되지 않는 건 단적인 증거다. 민주노총 사건은 그 아픈 지점을 되새겨주는 작용을 했다.

민주노총 간부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회유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조직 보호’였다. 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런 ‘하찮은’ 일로 대열이 흐트러지면 결국 정권만 좋아하게 될 것이란 논리다. 1970~80년대 독재정권 시절엔 이런 ‘조직의 논리’가 통했다. 거대한 악을 앞에 두고 내부의 잘못을 감추는 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개발독재 시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다.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의 요구로 생겨났으되 이젠 대중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조직’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진정 보호해야 할 건 ‘민주노총’이란 이름이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건 조직의 상처나 소멸이 아니라,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 민주노총뿐이랴.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 우울하게 하는 건 이명박 정권의 실정이 아니라, 마음을 줄 대안 정치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건 이명박 정권을 비판만 한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민주노총의 내부를, 전교조의 내부를, 민주당의 내부를 쑤시고 헤집는 걸 두려워한다면, 미래는 계속 답답할 수밖에 없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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