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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새해 가난합시다 / 박기호

등록 2009-01-16 18:53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
삶의창
10여년 전 서울 외곽지대에 있는 성당의 주임을 맡은 적이 있다. 성당 주변에는 기아산업과 대한전선의 하청 납품업체들이 많아서 생산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이른바 외환위기로 구제금융 위기 시기를 맞아 어음을 떼이고 직장을 잃은 젊은 가장들이 많았고, 견디다 못해 자녀를 두고 가출해버린 경우도 허다했다. 그 고통의 신음소리가 미사 때마다 절절히 느껴졌다. 무슨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날마다 놀고 있는 이들을 모아 집수리 일을 만들어 볼까. 주부들을 모아 소품조립 하청을 받아볼까?

시도해 보았지만 별로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격려의 설교 외에 사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좌절과 무력감에 울던 시기였다. 정치인의 무능력이건, 금융자본의 비윤리성이 원인이건 경제파탄도 무력 전쟁도 그 파편에 상처받고 죽어가는 것은 결국 가진 것 없고 무력한 서민들뿐임을 절감했다.

그 무렵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귀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왜 경제에만 매달려야 하는지? 도시 소비생활에 종속된 고단한 삶을 끝내 이어가야 하는지?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사회적 성찰은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귀농했던 이들 가운데 대부분도 경제위기 해소와 함께 도시로 되돌아갔다. 그때의 사회적 의지는 ‘참고 뛰자. 경제를 회복시키자’는 전투적 자기 다짐이 전부였다. 시대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실패하지 말자’며 그때 맺은 돈에 대한 충성서약에 순종을 강화해 온 10년이었다. 그런 흔들리지 않는 이념이 경제 대통령을 선출하게 했을 것이다.

경제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한다. 벌써 여러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폐업하고 있다 한다. 아, 이번에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무엇에 대한 서약을 해야 하는가? 진짜 무너지지 않을 산업 구조일까? 아니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어야 할까?

돈의 위력은 누구나 실감한다. 돈은 사람이 만들고 화폐라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돈도 자신의 능력을 가진다. 호주머니에 있을 때는 사람이 돈을 쓰지만 거대해지면 돈이 사람과 제도를 통제한다. 이른바 금융위기란 돈이라는 물건이 사람의 통제를 떠난 반란의 의미는 아닐까? 돈이 없어서 금융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온 것인데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할까? 그러므로 금융이 관리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류다. 성장과 고용의 방정식은 이미 폐기된 지 오래다. 인클로저 운동이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외자 유치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늘 엄격하고도 자비로우신 스승이다. 환란의 경험에서도 각성치 못한 우매함에 자비의 매를 들어 종아리를 때리신다. 깨달으라. 금융이란 본래부터 허상이다. 바다의 거센 풍랑도 육지 사람에게는 구경거리일 뿐, 위기란 같은 배에 탄 사람에게만 절명의 문제인 것이다. 금융 위기는 돈에 대한 복종 서약을 요구하는 악마의 놀음일 뿐이다. 노예로 사는 자 자유는 없다. 경제만을 외치는 사회는 노예의 선박과 같다.

경제라는 이름의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돈에 대한 신봉을 버리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소유욕에서 벗어나면 거기 삶의 풍요와 기품이 있다. 노동과 합일된 삶에 영성과 건강이 있고 자립 농업 건설에 무한한 일자리와 자족경제가 있다. 지난 10년의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의 성과를 결실 맺음에 사회 통합과 동아시아의 평화가 있고 진정한 위기의 해법이 있다. “독자 여러분, 새해 가난합시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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