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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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휘호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해마다 정초에 그해의 국정 방향을 담은 신년 휘호를 직접 붓으로 써서 발표했다. 지극히 실용적인 구호 형식이란 게 눈에 띈다. 1962년엔 혁명완수, 65년 근면검소, 72년 유비무환, 73년 국력배양, 75년 국론통일, 79년 총화전진 등이다. 62년은 5·16 쿠데타(당시엔 혁명이라 일렀다) 직후, 75년은 베트남 통일(당시엔 월남 패망이라 일렀다) 무렵이었다. 굳이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 뜻과 의도를 알 수 있다. 박 대통령 휘호를 연구한 구경서 강남대학교 겸임교수는 논문에서 “박 대통령은 이를 통해 국가적 목표를 국민에게 제시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결집했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선전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신년 휘호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다시 부활했다. 역시 서예를 즐겼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엔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썼다.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의 휘호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었다. 시작할 때처럼 끝을 잘 마무리하자는 뜻인데, 불행히도 그의 집권 말년은 잘 마무리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발표한 신년 휘호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인데, 당시의 구제금융(IMF) 사태와 잘 들어맞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에 따로 신년 휘호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발표한 신년 화두 ‘부위정경’(扶危定傾)의 뜻은 “위기를 맞아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서-이기전>의 ‘태조 부위정경, 위권진주(威權震主·위엄과 권위를 떨쳐 왕을 두렵게 한다)’에서 따온 말이다.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매우 어려운 한자성어를 택했다. 나라를 바로 세우고 위엄과 권위를 떨치는 걸, 자칫 과도한 ‘국가기강 확립’으로 오해하진 않길 바란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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