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이 7명의 교사를 학교에서 쫓아냈다. 몰상식을 넘어 야만이며 불의에 찬 전횡이다. 성추행이나 비리 행위를 저지른 교직원들이 경징계에 멈춘 경우와 견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잘못의 경중으로 바라볼 일이 아니라 우리 교육현장이 자유인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교육을 자유인이 아닌 마름과 머슴들이 주무르는 참담한 현실을 다시금 드러냈다.
공정택 교육감은 지배세력의 충실한 마름으로서 교육현장에 그를 닮은 머슴들만 남아 있기를 바란다. “가재는 게 편”이듯 마름과 머슴은 한 편이어서 머슴들은 성추행을 하거나 비리를 저질러도 용납되지만 자유인은 용납될 수 없다. 학생들과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겠다는 교사들의 바람을 막으려 한 교장들의 모습은 역겹기에 앞서 측은함을 느끼게 한다. 그들처럼 오로지 지배세력에 굴종하는 마름이어야 교장이 될 수 있는 구조는 일제강점기 이래 그대로다. 그런 마름들이 단위학교에서는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는 교장임용제도는 국가주의교육 관철을 위한 중요한 고리로 작용한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하는 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6세기에 18살의 젊은 나이에 <자발적 복종>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 폭력과 일상적 고문을 자행했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보다 이명박 정권이 더 두려운 대상이 될 수 있다. 강요에 의한 노예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히 노예 되기, 다시 말해, 비자발적 복종보다 자발적 복종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가 약화된 시기에 은밀히 노예가 된 경제동물이 양산될 수 있다. 전인적 인간이 사라지고 자유 지향도 사라진다. 이명박 정권은 자유인의 생존조건을 박탈하는 정치사회 환경을 더욱 노골화하면서 “생존하려면 굴종하라”는 명령어를 시대의 화법이 되도록 했다. 자유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유인에겐 생존권을 박탈하라. 학교에서 교사를 쫓아내고 와이티엔에서 언론 노동자를 쫓아내고 삼성재벌은 한겨레에 1년 넘게 광고를 끊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짐승처럼이라도 생존하려면 굴종할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그 어떤 시대에도 자유인은 살아 있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의 말처럼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며,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에게 불의에의 굴종은 곧 죽음이다. 무관심과 침묵을 거부하고 은밀히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자유의 지향, 그것은 인간성의 발현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여기, 몰상식, 부도덕과 불의에 맞서는 자유인의 무기는 저항과 연대다.
이번에 파면당한 선사초교의 송용운 교사는 “혼자 살려고 할 때 모두 죽고, 함께 죽으려 할 때 모두 산다”고 말했다. 그렇다. 학교 현장에서 “나도 징계하라!”는 저항과 연대의 구호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야 한다. 교사들이 계층에 허용된 물적 조건에 만족하는 경제동물이 아니라면. 우리 학교가 마침내 민주화되고 진정한 자유인을 길러내는 곳으로 거듭날 것인지는 일차적으로 교사들에게 달려 있다.
홍세화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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