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규 사회부문 교육팀장
편집국에서
요즘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정보를 얻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교과서 한 권이면 공부 끝’이던 시절과는 다릅니다. 입시 준비를 하는 데도 교과서는 학원 교재와 참고서 등의 위세에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교과서가 1년 내내 집중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교육적 필요 덕분에 주목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교과서가 모처럼 주연으로 등장한 무대는 불행히도 이념 논쟁 터입니다.
현 정부의 지지세력인 뉴라이트는 “교과서가 친북·반미·좌편향돼 있다”고 포문을 엽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편향된 역사교육 때문에 청소년들이 반미·반시장적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맞장구를 치고, 대통령은 “출판사들이 왜 편향된 교과서를 고치지 않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고등학생들이 1년 동안, 그것도 선택과목으로 배울 뿐인 근현대사 교과서를 두고 나온 말들입니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쥔 자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해대다 보니, 교과서는 어느새 사회를 위협하는 ‘마녀’로 둔갑해버렸습니다. 뉴라이트 등의 ‘좌편향 교과서’ 발언은 본격적인 ‘마녀사냥’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 뒤, 문명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과서 검정 권한을 지닌 교과부는 약자인 출판사들의 손목을 비틀어 수정을 강요합니다. 뉴라이트 단체들은 ‘친북 좌경’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명단을 공개합니다. 교장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는 시·도 교육청은 교장들을 불러모아 교과서를 바꾸라고 종용합니다. ‘교시’를 받은 교장들은 학교로 돌아가 교사들의 손목을 비틀며 교과서 재선정에 나섭니다. 교과서 저자들은 물론이고, 국내외 역사학자와 교사, 역사교육 단체, 대학원생들까지 나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코미디 같은 ‘역사교육 비틀기’ 시리즈의 압권은 단연 서울시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입니다. 특강 강사진을 두고 ‘친일·극우 드림팀’이라는 비판마저 잇따랐지만,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돌격대’를 자임하는 공정택 교육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입니다. 21세기 아이들에게 20세기 교육청이 19세기식 교육을 했다는 비아냥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정부는 ‘역사 논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웁니다. 그러나 정통성과 자긍심은 정부가 강요하거나 밝은 면만 보여준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교육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가 아닐까요? 더욱이 4·19 혁명을 ‘데모’로 폄하한 <기적의 역사> 영상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정부의 역사인식은 ‘민주화’는 외면하고 ‘산업화’만 자랑스러워하는 편협한 역사관입니다.
대통령까지 나선 ‘역사 내전’에서 정부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출판사는 교과부가 써준 대로 교과서를 고칠 것이고, 정부 공세의 ‘표적’인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상당수 학교에서 퇴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검정 교과서를 고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20년 전으로 후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번 일도 ‘역사’가 될 것입니다. 훗날 역사가들이 2008년의 역사 교과서 논란을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합니다.
이종규 사회부문 교육팀장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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