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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누가 헌법을 죽이는가 / 고명섭

등록 2008-12-10 11:40수정 2008-12-10 20:03

고명섭  책·지성팀장
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프리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60년 동안 헌법이 헌법 구실을 한 것은 겨우 10년이었다. 반세기 내내 나라를 쥐고 흔든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의 정신이자 기틀이며 모든 하위법의 아버지인 헌법 위에 보안법이 군림했다. 법률적 자식이 그 아버지를 능욕하는 패륜의 세월이었다. 양심·사상·언론·결사의 자유는 질식당했고, ‘경제를 민주화하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한다’는 헌법적 규범은 실종상태였다. 보안법을 앞세워 몰아치고 때려잡기만 한 정부와 정권에 맞선 피어린 항쟁 끝에 국민은 가까스로 헌법을 살려냈다. 그 헌법이 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다시 쫓겨나고 있다. 헌법만 쫓겨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함께 퇴출당하고 있다.

정부·통치를 뜻하는 ‘거번먼트’(government)의 어원을 추적하면 라틴어 ‘구베르노’(guberno)에 이르고, 구베르노는 희랍어 ‘퀴베르나오’(kybernao)에 이른다. 구베르노든 퀴베르나오든 ‘통치하다’라는 뜻보다 ‘키를 잡다’, ‘조종하다’라는 뜻이 앞선다. 그러니까 통치술의 기원에 항해술이 있었다. 국가 운영을 항해에 비유하는 오늘의 관행도 긴 연혁이 있는 셈이다. 플라톤이 국가를 항해 중인 배로 묘사하고 통치자를 키잡이로 부른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최초로 정치를 발견한 사람이었지만, 그 정치를 위험하게 본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 정치란 갈등·분열·기만·협잡의 기술이었다. 그런 기술이 구사되는 장이 말하자면, 선상이었다. 배의 주인인 시민을 앞에 두고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최고 조타수라며 키를 맡기라고 설득한다. 이들은 경쟁자를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도 안 될 경우엔 배의 주인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뒤, 제정신을 잃은 주인에게서 키를 잡을 권한을 받아낸다. 일단 갑판을 장악하면 권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끼리 흥청망청 잔치를 벌인다. 항해술의 귀재니 조타술의 천재니 하며 서로 추어주고 격려한다. 반대파는 무능한 자들로 낙인찍고 몰아낸다.

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시장과 광장을 돌며 ‘747’이니 ‘주가 3000’이니 술을 뿌려대던 후보가 조타수가 된 지 1년도 안 돼 선상이 난장이 됐다. 강부자·고소영 잔치판에 술취한 배는 암초와 빙산을 향해 마구 달린다. 하늘의 별을 읽고 바람의 냄새를 맡고 물길의 흐름을 보는 일, 참된 조타수라면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일엔 서투르고 허둥거린다. 이러다간 배가 난파하겠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짓누른다. 위협과 명령이 배를 지키는 최고법을 대신한다. 전리품을 분배하듯, 부자에겐 더 많이 돌아가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조금 있는 것마저 털린다. 분배의 정의는 찾아볼 수 없고 사회 안전망은 뜯겨 너덜거린다.

벼랑 끝에 몰린 서민은 경제한파의 억센 손아귀에 목이 졸렸는데, 밑바닥 생활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은 난데없이 목도리를 벗어 둘러준다. 임금이 무지렁이 백성에게 베푼 성은인가. 목도리는 목도리가 아니다. 한파의 손아귀를 감추는 은폐물일 뿐이다. 안전망이 찢겨 추락한 사람들이 삶의 벼랑에서 제 목에 감긴 밧줄에 매달려 버티고 있다. 과거 독재와 싸워 쟁취한 민주헌법이 고사당할 위기에 몰렸다. ‘국민이 국민을 위해 만든 국민의 법’이 죽으면 국민 자신이 죽는다. 배를, 나라를 제 자리로 돌려야 한다. 헌법을 지켜야 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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