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지역사회는 살아 있다 / 박기호

등록 2008-11-21 19:25

 박기호/신부
박기호/신부
삶의창
‘경축! 000양 서울대 간호학과 수시모집 합격!’

모처럼 읍내 나갔더니 수줍은 얼굴 같은 펼침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작년엔 한 명이었는데 올해는 두 명이 합격한 모양이다. 명문대를 들어가려고 학군을 찾아 이사 다니고, 특목고니 국제중이니 야단이고, 월 수백만원의 과외비를 지출하는 판에 학원 하나도 없는 충청도 단양 읍내 고교에서, 해마다 한두 명씩 합격자를 내니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거나 장성, 경무관 등으로 승진한다든가 하면 국도변에 ‘아무개 아들 000 합격, 승진’ 등 펼침막을 내걸고 잔치를 벌이는 일은 지방에서는 자연스럽다. 기쁜 소식을 자기 문중의 경사처럼 여기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전통적인 향토 공동체성이 살아 있다는 징표다.

그렇지만 생각건대 우리 시대 가장 불행한 현상은 모든 것이 서울로 통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 예산 집행의 결정은 서울에서 이뤄진다. 그 결정은 전국의 삶을 좌우하게 되지만 지방은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그저 구경꾼 노릇만 할 뿐이다. 정치와 외교, 돈, 교육, 문화·예술·스포츠, 사회적 지위, 여론과 방송, 유권자 …. 그러기에 모두 서울로 간다.

그런가 하면 또 많은 사람들이 서울과 도시를 떠난다. 전원생활이건 귀농의 차원이건 시골로 찾아간다는 것은 작은 삶을 구하는 것이다. 지역사회라는 작은 삶에는 공동체성이 있다. 작고 소박한 삶에는 무엇보다 인정과 관계적 삶이 있다. 거대한 공룡은 무너지면 일어나지 못하지만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작은 삶은 죽어 있는 듯해도 서로 기대고 살아나 이어지는 민초의 생명력을 가진다.

산촌마을의 촌락에는 전통적인 공동체성이 살아 있다. 얼마 전 ‘삶의 창’에 소개했던 소화 아기의 할머니가 지난주 갑자기 작고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남정, 아낙 할 것 없이 찾아와 자기 집안일처럼 돕는다. 가까운 읍내나 제천에서 살고 있던 마을 출신 장년들도 찾아와 밤을 새우고 상여꾼을 한다. 우리 가족들도 소화네 집으로 가서 이틀간 함께 음식을 만들고 조문객을 접대하며 잡일을 거들었다. 소화 할머니는 아름답고 화려한 꽃상여를 타고 구성진 상엿소리를 들으시며 출상하셨다.

소수 인구의 지역사회에도 공동체성은 살아 있다. 읍내의 공무원에서 상인에 이르기까지 향토인이다. 젊은이들은 어느 동네 아무개의 자녀다. 그런 관계로 타인의 이목과 염치를 의식함이 체질화되어 있다. 군수·면장 등 기관장은 농가 소득을 위한 시설 마련에 열심이고, 고추·마늘·절임배추를 팔아주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닌다. 신세대 공무원들은 친절하되 원칙주의를 잃지 않는다. 머지않아 지방 토호들의 전횡도 사라질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내 땅이란 의식에서 그런 태도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현대 산업사회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지역사회를 해체시켰다. 그리고 현대화, 대형화, 글로벌 마인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자유무역을 우상처럼 받들고 살아왔다. 그러나 작금의 금융위기에서 보듯이 그것은 글로벌적인 허구다. 진정 조화로운 삶의 길은 지역사회 공동체라는 소박하고 작은 삶뿐이다. 이것이 전통적 인습과 풍습으로 받은 무형문화다. 존중하고 보존해야 한다. 소농에 희망이 있듯이 작은 삶에 조화와 평화가 있다.


서울 명문대로 진학하는 우리 고장 합격생들이 좋은 재목으로 성장하기를 축원한다. 바른 철학과 좋은 학문을 익혀서 우리 고장으로 다시 찾아와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며 삶의 자리를 이어받을 날을 꿈꾼다.

박기호/신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1.

[사설] 속속 드러난 ‘윤석열 거짓말’,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2.

윤석열 파면되면 국힘 대선후보 낼 자격 없다

나의 완벽한 상사 [세상읽기] 3.

나의 완벽한 상사 [세상읽기]

딥시크, ‘제번스의 역설’처럼 고성능 칩 수요 늘릴까 [유레카] 4.

딥시크, ‘제번스의 역설’처럼 고성능 칩 수요 늘릴까 [유레카]

공교육에 부적합한 AI 교과서, 세금으로 무상보급 웬 말인가 [왜냐면] 5.

공교육에 부적합한 AI 교과서, 세금으로 무상보급 웬 말인가 [왜냐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