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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인간의 정서

등록 2008-11-16 21:56수정 2018-05-11 16:02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서두르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재협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정치적인 이유로 입장을 번복”한 것도 아니며,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양심선언”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국민은 노 전 대통령에게서 “재임시 한-미 에피티에이를 밀어붙인 것은 과오였다 ….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린다”라는 고해성사를 듣고 싶을 거라며 토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상상력’이나 ‘자기 성찰’과 거리가 먼 ‘합리화하는 동물’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요구일 것이다.

인간 정서는 나에게 노무현과 오바마를 달리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전자에게서는 일찍이 접어야 했지만 후자에게선 당연히 기대로 남아 있다. 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대자본의 압력 앞에서 어차피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버락 오바마는 그래도 저항하거나 저항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다. 흑인의 정서가 따로 있다고 믿지 않더라도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배달호 씨의 분신 앞에서 “민주화된 시대에 …”라고 말하는 ‘인간에 대한 무례’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실상 내 ‘분노의 포도’는 이라크 파병 때문이 아니었다. 이념의 차이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너무 모진 탓일까, 그러나 “민주화된 시대에 ….” 발언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인간에 대한 배반 때문이었다. 역시 처지가 의식을 규정하고, 권력의 일상은 인간의 정서를 마모시키는가. 당시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는 이른바 ‘386’들을 포함하여 “이건 아니다!”라고 발언한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그때 이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오늘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 세력은 그들을 일컬어 좌파정권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정서, 그에 대한 고민을 상실한 세력이 좌파 정권이라 …. 좌파에 대한 모독이 따로 없다. 어쭙잖은 좌파인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 좌파는 많지 않다. 좌파는 없는데 좌파 정권은 있는 나라. 물론 극우에겐 우파도 좌파겠다. 그래서인가, 좌파로 지목된 사람들이 스스로 아니라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새 황금분할을 발견한 양 ‘좌파 신자유주의’를 말한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이웃에 대한 상상력과 자기 성찰, 인간 정서로서 너무 버거운 요구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지키면서 물질적 풍요도 누리겠다는 것은 ‘염치없음’의 고백이어야 하지만, 한국과 같은 경제동물의 사회에서 인간 정서와 염치를 지키려면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적절히 타협하며 황금분할이라고 합리화하는 흐름이 자리 잡힌 것은 그 때문이리라. 특히 자식 교육은 일탈로 나아가는 빌미를 제공한다. “너야 네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지만, 네 자식에게까지 똑같은 짐을 지우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라는 말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환경운동연합의 일탈이 그럴지 모르며, 농촌지역 교사이지만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 날마다 50킬로미터를 자동차로 왕래하는 전교조 조합원이 그럴지 모르며, 주식투자를 하는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들이 그럴지 모른다. 연대는 점차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설령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변곡점이 온 것은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는 끝내 역주행의 고집을 부리겠지만 우리는 황금분할의 꼼수를 버려야 한다. 지난 금요일 510일 투쟁을 마감하는 마지막 문화제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룬 이랜드를 기억하며. 인간 정서를 되찾기 위해.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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