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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삶의창
애국심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문화적·언어적 공동체에 속한 ‘국민’이 공유하는 역사·전통·관습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에는 ‘헌법애국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주로 철학자 하버마스가 제창해온 이 개념은 물론 ‘나라 사랑’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의 특이한 점은 애국심의 근거를 ‘문화적 공통유산’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서 찾는 게 아니라, 국가의 정치체제를 규정하는 헌법의 기본이념에 대한 국민적 동의와 충성에서 찾는다는 데 있다.
독일에서 이런 사상이 등장한 것은 독일 현대사의 비극적인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국가의 재건은 500만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즘의 유산을 청산하고, 그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새로운 독일의 출발에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적 내셔널리즘의 부활을 철저히 봉쇄하기 위한 틀이, 예컨대, 서독의 ‘기본법’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독일의 ‘기본법’에는 시민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규정 외에 국민 저항권, 난민 보호, 헌법재판소 설치 규정 등이 명기되어 있다. 이와 같은 헌법적 규범은 독일 국민들에게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까 헌법애국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오늘날 독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자기들이 만든 헌법이 훌륭하고, 그 헌법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랑스러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독일인 다수는 자신이 괴테와 칸트와 베토벤의 후예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거기서 독일 사람 됨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적어도 공론의 장에서는 민족주의적 요소를 암시하는 어떠한 담론도 배제한다는 것이 독일 사회의 합의된 원칙이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헌법애국주의라는 사상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헌법애국주의란 독일의 경계를 넘어서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될 만한 선진적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적 공통유산’을 갖고 있지 않은 외래인, 이민자,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일 뿐만 아니라, ‘민족’이니 ‘공동체’니 하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온갖 사회적 차별을 은폐하고자 하는 기도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사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면서, 국민 개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국민’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와 법의 운용 앞에서 갈수록 절망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거에 이겼다고 해서 마치 점령군처럼 군림하면서 만사를 강자 위주의 시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만용이 놀랍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과연 ‘국민공동체’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이라는 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소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 기득권층의 최소한의 염치를 기대하는 것에 불과한 종합부동산 세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 나라의 지배층이 무슨 수단을 가지고 시민들의 ‘애국심’을 장려할 수 있을 것인지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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