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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연애에서의 세대차이 / 박범신

등록 2008-10-31 19:55

 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삶의창
신기하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를 새로 시작해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경우, 연애를 시작하면 언제나 성적은 가파른 하향곡선으로 추락했다. 어디 성적뿐인가.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부모님에겐 늘 불효자가 되고 친구들에겐 ‘왕따’가 되었다.

신기한 게 또 있다. 아주 실용적인 학문이라면 또 모르지만, 문예창작학과처럼, 예술 창작을 연마하는 학생들도 이른바 모범생 타입은 모든 교과목에서 균일하게 상위권을 유지한다. 시 창작, 소설 창작은 물론이고 희곡, 평론, 아동문학 창작 과목까지 성적에서 편차가 없다. 이것 또한 지향이나 선생에 따라 과목별 편차가 심했던 젊은 날의 나와 아주 대조적이다.

나는 때로 요즘의 ‘젊은 그들’이 부럽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 세대보다 안정적이고, 감정의 기복을 무난하게 여밀 수 있으며, 절제를 통해 ‘튀지 않고’ 사는 기술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연애는 여전히 평화보다 ‘투쟁’에 가깝다. 사랑은 합리성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감정이어서, 한번 연애에 돌입하면,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락과 상승이 반복되고, 주관과 객관이 전도되고,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선택의 경계가 무화(無化)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공부라고 뭐 다르겠는가. 특히 창작이란 비정상적인 감정의 반응을 포착하여 그 씨앗으로 얻어내는 과실 같은 것이라서, 심리적 균형은 경우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내가 느끼는 세대차이의 기호이다.

내 젊은 날은 지향에 대한 절대적인 열망 때문에 일상에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고, 지금의 보편적 ‘젊은 그들’은 모든 걸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고 관계 맺기 때문에 균형에 따른 부가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젊은이는 안전가(安全價)의 주식을 사지 않는다”고 말한 장 콕토 같은 사람은 확실히 전근대적이다. 그런데 나는 때로, 지금 만나는 ‘젊은 그들’보다 한 세대 이상 먼 장 콕토를 더 가깝게 느낀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연애도, 창작도, 그것에 대한 절대적 지향 때문에 끝없는 내적 분열의 고통을 매일 감당해 가야 하고, 그 ‘투쟁’을 창작과 삶의 동력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나 같은 사람에게, 상대성을 견지하며 비교적 균일하게 매사를 챙겨 가도록 훈련받은 안정적인 ‘젊은 그들’이 부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심이 많은 나는 돌아앉아 그들의 뒤꼭지에 대고 이따금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쟤네들, 연애를 진짜로 하기는 하는가? 문학을 진짜로 하기는 하는가?’


수시모집 면접 날, 운동장으로 자가용이 미어터진다.

면접시간이 다 끝나도록 캠퍼스 곳곳에 진을 친 자가용은 움직이지 않는다. 불안한 부모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골에서 올라온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스무 살 다 된 ‘청년’들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으로 태워 오고 태워 가는 것일까. 나는 그것 역시 부럽고 신기하다. 어쩌면, 연애를 해도 성적이 절대 떨어지는 법 없고 ‘무엇’이 되고 싶으면서도 성적의 과목별 편차가 전혀 없는, 안정적 ‘젊은 그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그 풍경에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균형은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나 젊은 날의 자기 지향을 오지게 쫓아갈 수 있는 동력은 필연적으로 불균형하게 드러나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나는 아직 버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매사 상대적인 관계로써 안정감을 확보한 ‘젊은 그들’보다 여전히 내부적 불균형 때문에 불편하게 살고 있는 ‘늙은’ 내가 오히려 덜 권태롭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안정감은 권태와 고독의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올리는 힘이 없다.

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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