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경제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싸움에 여념이 없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제2의 촛불집회를 열겠다고 한다. ‘아이엠에프(IMF)를 능가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이게 어디 될 법한 일들인가. 온 국민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 이명박 대통령은 이렇게 외치고 싶을 것이다. 국회 연설엔 그런 속내가 묻어난다.
그러나 싸움의 불을 지핀 건 현 정권이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모든 어려움을 ‘지난 정권 탓’으로 돌리고, 교육과학기술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들은 ‘잃어버린 10년’의 흔적을 지우느라 정신이 없다. 노무현 정권과 가깝다고 알려진 기업들을 모조리 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까지 캐내라고 일부 여당 의원들은 목청을 높인다. 경찰은 유모차 엄마들을 수사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 엄마들을 국회로 불러내 삿대질을 한다. 말로는 ‘힘을 모으자’고 하면서, 사회 곳곳에 분열과 쟁투의 불씨를 뿌린 게 이 정권이다. 이러니 ‘위기는 위기고, 투쟁은 투쟁’일 수밖에 없다.
국가위기 상황은 정권엔 기회이기도 하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그러모아 초당파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 이 정권은 그걸 스스로 포기했다. ‘촛불 공포증’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서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공포는 종종 과도한 집착을 낳는다. 정권이 흔들린다는 두려움은 촛불집회에 대한, ‘좌파’에 대한 도를 넘은 반격으로 나타났다. 정치적 논란이 된 사안에서 현 정권은 단 하나도 양보하려 하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밀리면 그게 또다른 촛불의 불씨가 될까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니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우선순위가 경제 살리기인지, 반대세력을 제압하자는 건지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신뢰의 상실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지금 이명박 정권엔 전체 상황을 아우르면서 강온을 조절하는 전략 그룹이 없다. 각자 코앞의 전투에선 밀릴 수 없다고 버티는 소대장들만 즐비하다. 당정에서 언론정책을 다루는 이들은 절대 와이티엔(YTN)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버티고, 치안을 맡은 이들은 유모차 엄마들까지 사법처리를 해야 법질서가 산다고 주장한다. 당은 당대로 정부를 공격하고, 청와대는 당이 도와주는 건 없이 발목만 잡는다고 비판한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별게 아닌 고지 몇 개를 지키느라 전체 전선이 무너지고 있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질 않는다.
전략적 판단의 부재는 정권 핵심그룹의 부재와 일맥상통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측근은 있지만, 그들은 과거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과는 다르다. 위기에 처하면 정권의 활로보다 자신의 안녕을 먼저 생각한다. ‘S(서울시) 라인’ 핵심이었던 이봉화 전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이, 자신 때문에 정권이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끝까지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티려 했던 건 이런 ‘이명박 사단’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는 게 두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촛불로 정권이 무너지진 않는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현 체제로는 희망이 없다고 대중이 느낄 때 정권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이 대통령이 해야 할 건 제2의 촛불을 막기 위한 공안 공세가 아니라, 온 국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먼저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1992년 민주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이, 이라크 전쟁 승리에 취해 있던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던졌던 선거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촛불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박찬수 논설위원pc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