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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염치에 대하여 / 김종철

등록 2008-10-17 20:59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삶의창
4년 전, 마흔여덟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시인 윤중호는 지독히 고향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고시집 <고향길>은 그가 드물게 아름답고 깊고 애절한 절창의 시인이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만, 이 시인은 우리 모두가 결국 고향으로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임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 따위란 무의미한 것이며,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이룬 바 없이” 흔적 없이 살다가 돌아간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었다. ‘고향’ 앞에서 우리는 모두 발가벗은 어린아이일 뿐이며, 그러므로 인생의 성숙은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데에 있다.

그런 윤중호가 쓴 <일산에서>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일산시민모임에서 땅을 빌려 만들었다는 주말 텃밭 /쇠비름만 자라는 다섯 평짜리 박토지만 /이름은 어엿한 주말농장 /글쎄 그런 걸 해도 괜찮을까? /무공해 채소가 어떠니, 흙을 밟는 마음이 어떠니, 이런 막돼먹은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 오늘날 우리들은 주말농장이니, 농촌관광이니, 유기농이니 하면서 어설픈 농사 흉내를 내면서 도시생활의 불모성과 삭막함을 잠시나마 벗어나보려고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사실 가소롭고 건방진 작태인지 모른다. 지난 수십년 동안 산업화, 경제발전이라는 이름 밑에서 끊임없이 모욕과 천대를 당해 온 우리들의 고향, 즉 농촌과 농민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말농장’ 운운하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 윤중호가 흙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으로 ‘주말농장’에 끌리면서도 “그런 걸 해도 괜찮을까, 막돼먹은 생각이 아닐까”라고 주저하는 것은 결국 그런 염치 때문이었던 것이다.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농가에 돌아가야 할 쌀 소득보전 직불금을 공직자와 부유층들이 가로챘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뉴스이다. 아무리 말세라고 하지만, 인간이 이토록 염치가 없을 수 있는가. 직불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죽어가는 농촌과 농민이 최후의 잔명이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마련된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아닌가. 그것은 농민들에 대한 혜택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랜 농민공동체의 전통과 지혜에 근거하여 땀 흘려 땅을 보살핌으로써 인간 생존의 토대 중의 토대를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보상으로는 터무니없이 하찮은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을 농사와는 아무 관계 없는 도시의 잘난 인간들이 가로챘다는 것은, 아무리 합법적인 탈을 쓰고 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짓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든, 사회든, 인간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존립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적 기초를 파괴하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노골적인 파렴치범들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과연 얼마나 지금 죽어가는 농촌과 농민의 현실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잠재적으로는 저들과 똑같은 투기꾼, 똑같은 파렴치범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회만 되면 우리 자신도 그들처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땅과 농사를 그저 투기와 화폐 증식 수단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는 한, 세계의 황폐화·사막화는 필연적이다. 땅이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이에 비하면, 금융위기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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