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혀’

등록 2008-10-05 21:15수정 2018-05-11 16:01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최근 두 편의 <혀>를 읽었다. 하나는 중견작가 조경란의 장편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예 주이란의 단편이다. 조경란의 장편은 <문학동네>에서 2007년 11월에 초판이 나왔고, 주이란의 단편은 신생 출판사에서 2008년 9월에 나온 주이란 소설집에 담겼다. 소설집 띠지는 “<혀>의 작가 조경란이 2006년 심사한 주이란의 혀”라고 적어 표절의혹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두 편의 <혀>는 제목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맛보고 거짓말하는’ 혀의 용도가 같고 혀를 잘라 요리해서 먹는다는 엽기적인 결말까지 똑같다. 다만, 주이란의 단편은 주인공이 자기 혀를 잘라 스스로 먹는 대신, 조경란의 장편은 요리사인 주인공이 애인을 빼앗아간 여자의 혀를 잘라 요리해서 애인에게 먹인다는 차이가 있다. 문외한의 어줍잖은 소리겠지만, 주이란 단편은 주인공의 성격과 발칙한 문체가 엽기적인 결말까지 저항 없이 연결시킨다고 느낀 데 반해, 조경란 장편은 맛 기행을 곁들인 평범한 연애소설이 느닷없이 ‘올드보이’식 결말로 나아간다고 느꼈다.

표절 공방이 당사자에게 주는 상처는 깊다. 표절을 밝힐 물증을 찾기 어렵듯이 표절이 아님을 증명할 방법도 쉽지 않다. 표절 의혹은 신중히 제기해야 할 터. 그런데 주이란은 적극적이다. 문단에 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선배 작가의 조언처럼 표절당했다는 확신이 서더라도 그 억울함과 설움을 새 작품에 대한 치열한 자세로 승화시키는 게 낫겠지만 주이란은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벌이고 있다.

이따금 문단에서 표절 시비가 들려오곤 했다. 대학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빼앗거나 도둑질하듯이 문학적 상상력들이 도둑맞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지만 유야무야로 끝나곤 했다. 문단에 표절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때도 있었다.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에 비해 문단 진입 장벽이 높은데다 등단한 뒤에도 적은 지면을 놓고 경쟁하면서 생존을 꾀해야 하는 데서 문단권력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졌으며 그것이 작가정신을 질식시킨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메아리 없이 지나가곤 했다.

주이란은 문단 진입을 아예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표절을 확신하기 때문일까. 최근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저는 영혼을 도둑맞았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부제를 “조경란의 소설 <혀>는 표절입니다”라고 달았다. 주이란의 도전적인 자세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주류 신문과 문단의 무반응이다. 문단권력의 성채가 얼마나 단단한지 보여주려는 것일까, 표절 시비에 관해 ‘조·중·동’에서 기사를 찾을 수 없듯이 문단도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조경란은 보란 듯이 동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위로’받았다. 아무리 초짜 신인의 목소리라 하지만 “짖을 테면 짖어라!”라는 반응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졌고 <오리엔트 특급>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집단 살해’에는 비겁한 침묵은 없다. ‘다정도 병이런가’를 넘어 약자의 처지에 서는 역지사지의 고질병이 도져 문외한인 주제에 두 가지 <혀>를 읽었던 것이다.

두 편의 혀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두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본디 남을 모두 속일 수 있으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간다. 자신과 부단히 싸우지 않은 채 치열한 작가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 시간에도 어려운 조건 속에서 외롭게 자신과 싸우는 작가와 지망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박찬수 칼럼] 1.

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박찬수 칼럼]

중국은 ‘윤석열의 전쟁’을 우려하고 있었다 2.

중국은 ‘윤석열의 전쟁’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3.

[사설] 김용현 궤변 속 계엄 찬성했다는 국무위원 밝혀내야

[사설] 윤석열 구속기소, 신속한 재판으로 준엄히 단죄해야 4.

[사설] 윤석열 구속기소, 신속한 재판으로 준엄히 단죄해야

도사·목사와 내란 [한승훈 칼럼] 5.

도사·목사와 내란 [한승훈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