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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과경제] ‘지리산길’에서 만난 ‘삶의 경제’ / 강수돌

등록 2008-10-01 19:55

강수돌  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강수돌 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삶과경제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십니다” “쉬엄쉬엄 가셔요” ‘지리산길’ 300㎞ 중 이미 열린 20㎞를 걷는 사람들 사이의 인사말이다. 지리산길은 지리산을 에두르는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함양·산청·하동 등 100여 마을을 잇는 순롓길이다. 이미 유럽엔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약 700㎞의 ‘산티아고 순롓길’이 있어 많은 세계 시민들이 몰린다. 크게 보면, 산을 타고 올라 꼭 정상을 ‘정복’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풍토에 대한 대안이다.

지리산 길도 지리산 곳곳에 걸친 옛길·숲길·고갯길·강변길·논둑길·마을길·농삿길 등을 서로 이어 한 바퀴 돈다. 뭇생명의 이어짐이 핵심이다. 정상을 정복하고 승리의 쾌감을 외치는 게 아니라 어머니 같은 자연의 품에 조용히 깃드는 거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자연성, 즉 본성을 다시 찾으려는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전국을 뚜벅뚜벅 걷고 계신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순례’나 최근 시작한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의 ‘오체투지 순례’를 평범한 우리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부동산 개발과 일확천금 돈벌이에 미쳐 도는 세상, 10억짜리 집이 7억으로 떨어졌다고 땅을 치는 세상에서, 참된 삶의 경제란 이렇게 ‘돈 안 되는 일’부터 시작한다. 걸음도 느긋하게, 마음도 느긋하게 말이다.

2008년 4월 처음 열린 지리산 순롓길은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시작해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을 거쳐 휴천면 세동마을로 간다. 산세가 매화처럼 예쁜 매동마을 전 이장님과 현 부녀회장님은 “아침밥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서시라”면서도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마을공동체를 지키느라 몇 해 전 막개발 바람에 대항해 4년 동안 목숨 걸고 싸웠다고 자랑하신다. 두 주민이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이겨, 오늘날 녹색 체험마을도 만들었다. 우리 팀 모두 뜨거운 박수를 쳤다.

고불고불 아름다운 다랑이 논을 지나 거북이 등같이 생긴 등구재를 쉬엄쉬엄 오른다. 고갯길 한참 아래 옹달샘 곁엔 원두막 모양의 쉼터가 있다. 칠십 노부부가 마치 자식들 맞듯 반갑게 웃으신다. 점심을 못 먹었다는 우리에게 ‘식은 밥’을 내놓으며 “이걸로 밥이 되것누!” 하며 챙기신다. 할아버지는 “얼렁 싱싱한 고추 좀 따 와야제” 하시고, 우리가 “고추는 여기도 많은데 …”라고 농을 걸자 할머니가 “그런 고추 말고 …” 하신다. 돈 받고 파는 막걸리와 라면이지만 아직도 사람 냄새 풀풀 난다. 광우병 쇠고기와 멜라민 소동이 세상을 뒤흔들어도 아직도 풋풋한 삶의 경제는 평화롭기만 하다.

멋진 당산나무 아랫녘 창원마을엔 따사로운 가을 햇살 속에 노인 몇이 나락을 말리느라 고무래질이 한창이다. “올해 농사 잘 됐나요?” “예, 잘 됐어예!” 넉넉하고 환한 얼굴이 수수밭과 조밭의 옹골찬 알곡처럼 풍요롭다. 굽은 허리에 손수레 미는 할머니를 살짝 도와드리는데 왠지 목이 메고 눈매가 젖어든다.

현재 전국에 농사짓는 분이 250만인데 해마다 30만씩 줄어든다니, 10년도 못 가 거덜날지 모른다. 정치가들은 곡물값·기름값 폭등에도 ‘발등의 불’만 끄려 든다. 돈벌이에 미친 이들은 식량·에너지 위기에 아랑곳않고 ‘대박’만 터뜨리자는 식이다. 그러나 자기 땀에 기대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 민중이야말로 삶의 경제를 일구는 진짜 일꾼 아닌가.

이렇게 지리산 순롓길은 돈과 권력에 끊겼던 우리 마음의 길을 활짝 열어젖힌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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