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삶의창
해가 저물면 가족들은 자녀들과 함께 평온한 저녁시간을 맞는다. 이내 하루 낮 동안 땀 흘리고 분주하던 식구들은 다시는 깨어날 것 같지 않은 깊은 침묵과 안식의 세계로 빠져버린다. 마을에서 보는 달밤은 그야말로 백야다. 소백산 선녀들이 달빛을 타고 구봉팔문을 들락거리는 듯하다. 달이 없는 밤의 골짜기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 갇힌다. 대신 무척 밝게 반짝이는 별밤이 된다. 너무 가까이 떠 있어서 키 큰 사람이 팔짝 뛰어 한 번 훑으면 족히 한 말 정도는 쏟아진다. 가끔 놀러 온 도시 아이들은 디브이디(DVD) 스크린에서만 보던 그림이 사실로 펼쳐짐에 놀라고, 하늘의 별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에 놀란다.
별을 헤면서 ‘귀농’의 의미를 새겨본다. ‘농’(農)이란 글자가 ‘별을(辰) 노래하다(曲)’ ‘별의 노래를 듣다’란 의미일까? 별을 세며 노래하던 시절,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워했던 동심의 나라로 돌아가는 삶을, 이제는 이미 해체당한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동경하는 삶으로, 그래서 위성안테나가 아니라 영적 세계를 향한 영성의 안테나를 맞추고 살아가려는 귀의의 삶이 진정한 귀농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디 사람이란 그런 양식으로 살게 되어 있음을 성경의 창세기가 들려준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숲과 강, 온갖 피조물이 어우러져 사는 것이 완전한 세계의 형태이며 온전한 질서다.
창세기는 진화론적 탐구처럼 생명의 기원을 밝히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려는 책이다. “하느님이 진흙으로 당신 모습을 본뜬 형상을 만들고,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을 하였고 생살여탈권을 당신 친히 가진다는 점에서 존귀한 인권을 선언한다. 이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차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되게 했다. “하느님이 첫 사람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며 동식물을 돌보라” 하셨다. 인간의 평화롭고 건강한 삶의 기반은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는 것이다.
지상의 것들 가운데 가장 조화롭고 영적 세계와 가까운 것이 자연이다. 그래서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 마을이나 깨달음의 구도자들을 끌어들인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보시고 행복해하셨다”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곧이어 질서를 이탈한 에덴동산의 타락, 카인의 살인 등 이야기가 나온다. 조화가 깨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니 고통과 번뇌의 원인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질서의 이탈은 혼돈을 부르고 창조계를 해체시킨다.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고, 하늘이 있어도 별을 볼 수 없다. 땅이 있어도 신발에 흙이 묻지 않고 겨울이 되어도 웅크릴 일이 없고 여름이 되어도 땀 흘릴 일이 없다. 콩쥐팥쥐 해님달님 이야기를 들려줄 할머니의 무릎도 없고 들어줄 아이도 없다. 선악도, 가치 정의도, 이념도 온통 혼돈이다. 과학기술, 개발과 성장, 투자 유치, 일자리 창출이란 이름의 날카로운 발톱이 모든 것을 사정없이 파헤쳐 버린다.
정부가 녹색성장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한다. 헷갈린다. 문제는 마인드인데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 안달하고, 강산을 뒤집어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포기선언’이 없는 토목꾼의 같은 입에서 그런 숭엄한 정책을 말씀하시니 전혀 믿음이 안 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땅에 소유의 금을 긋지 않았다. 토지도 인격도 문화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 가치로 계산하는 혼돈의 시대는 치유되어야 한다. 창조는 혼돈에서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밤 별님에게 물어봐야겠다.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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