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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길들여지지 않은 정신 / 김종철

등록 2008-09-19 18:05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삶의창
마음이 허전할 때, 문득 그리워지는 분들이 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방송극작가 박이엽 선생도 그런 분이다. 박이엽은 문필가이기 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고 민병산 선생과 함께 나란히 인사동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떠돌던 ‘무욕’의 철학자이자 탈속의 현인이었다.

원래 민병산이나 박이엽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분들의 뛰어난 번역 때문이었다. 나는 일본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지만, 내가 큰 감명을 받은 작품은 대개 민병산 번역이었다. 원작의 질 못지않게 역자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감수성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음이 틀림없다. 박이엽의 번역도 일품이었다. 나는 그가 옮긴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혹은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외국어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는 물론, 우리말에 대한 그의 풍부한 교양과 예민한 감각이 늘 경탄스러웠다.

그런 박이엽의 학력은 중졸이었다. 그의 지식과 교양은 밑바닥 생활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배움의 결과였다. 그의 추모문집이 작년에 <저절로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지만, 그중에서 내게 무척 인상 깊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원래 젊어서부터 폐병으로 고생하던 박이엽은 1970년대 어느날부터 어떤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다. 그를 담당했던 나이 지긋한 의사는 첫날 진료가 끝나자 박이엽에게 다음부터는 병원이 아니라 의과대학의 자기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병원에 올 때마다 진료비를 따로 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후 연구실에서 만날 때마다 그 의사/교수는 자신의 캐비닛에서 한달치 약을 꺼내 이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로 주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대학병원의 규칙을 어겨가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 누구에게나 그런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의사는 박이엽을 앞에 앉혀놓고 담배가 해롭다는 이야기를 길게 해주었다. 그 당시는 담배의 유해성이 아직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고 있었다. 이때 박이엽은 ‘사실 담배를 끊을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환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의사에 대한 인사성으로 “그럼 저도 담배를 끊어야 할까요?”라고 예의 바른 척 물었다. 그러자 당장에 의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자슥아, 네가 담배 시작할 때는 내 허락 받고 했어?” 의사는 이 청년 환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박이엽은 평소에 환자에게 그지없이 인자하면서도 환자의 ‘교활한’ 태도에는 조금도 용서가 없는 의사의 이 솔직담백한 인간성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후 그 의사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더 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빈틈없는 시스템 속에서 관리되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세련된 삶, 근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병원의 의사가 병원당국 몰래 환자를 자기 연구실로 오게 하여 약을 공짜로 준다든지, 환자에게 거리낌 없이 화를 낸다든지 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인간적인 배려와 반응은 오늘의 ‘진보된’ 사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다. 더욱이 이미 이 체제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행동은 오히려 촌스러운 것으로 비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촌스러운 야생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하는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된 ‘친절’은 결코 친절이 아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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