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 학고재 주간
삶의창
집 앞에서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언성을 높인다. 이 동네에 사느냐고 묻고선 대뜸 “세상에 이런 동네가 다 있느냐”며 침을 튀겼다. 흥분하는 기색이 아침부터 봉변이라도 당한 꼴이다. 방금 승객을 동네 건물 앞에 내려준 기사는 이 건물 찾는 데 이십 분을 허비했단다. 승객이 어느 건물로 가자 해서 왔는데 그곳을 아는 이가 동네에 한 명도 없더라고 했다. 기사는 지척에서 빙빙 돌며 일곱 명에게 물었고 모른다는 답만 들었다. 도리 없이 내려서 찾아봤더니 코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건물 바로 앞에서 물었는데,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데, 다 모른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며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무슨 동네 인심이 이 따위냐”며 애먼 나에게 눈을 부라렸고 “알면서 모른 척한 게 분명하다”며 분을 퍼부었다.
기사가 찾은 건물은 사회복지시설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있다. 창문이 여섯 개 달린 야트막한 집채다. 간판이 있지만 이름을 애꿎게 지어 나는 그냥 ‘애달픈 집’이라고 부른다. ‘애달픈 집’에는 신체와 정신이 불편한 분들이 모여 산다. 문은 늘 닫혀 있다. 나오는 이, 들어가는 이가 뵈지 않아 적적하다. 낡은 상가를 허물고 이 집을 짓던 그해, 아파트 주민들은 연판장을 돌렸다. 그들은 눈앞에 장애인 수용시설이 들어서는 게 싫었다. 결국 소송이 붙었고 패소한 주민들은 변호사 비용을 추렴해야 했다. ‘애달픈 집’은 도로에서 좀 들어간 구석이라 택시기사가 찾기가 쉽지 않다. 동네 주민들은 다 안다. 누가 물으면 말을 안 해줄 뿐이다. 이 동네에선 있어도 없는 집이 ‘애달픈 집’이다. 없는 집에 사는 분들은 있지만 출입이 뜸해 그분들 역시 있어도 없다.
아주 드물게 자원봉사자들이 이분들을 인솔해 나올 때가 있다.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장애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걷는다. 강강술래라도 하듯이. 모두 웃는 표정이다. 찡그린 얼굴이 없다.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는 얼굴은 낯선데, 낯설어하는 주민을 보고 그들은 또 웃는다. 웃을 때 그들은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생명처럼 보인다. 여성 장애인들은 길바닥에서 서로 립스틱을 발라주기도 한다. 입을 오므려 발린 색을 문지르는데, 심하게 떨던 손이 뺨에 립스틱 자국을 남기자 그걸 보고 또 와르르 웃는다. 웃기만 하지 장애인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무리 가운데 있어도 그들은 제가끔 혼자다. 그저 잡은 손들을 꽉 쥘 따름이다. 없는 집이 있는 집처럼 여겨지는 날은 그들이 집 나설 때뿐이다.
일요일 산책하러 나가다가 ‘애달픈 집’ 현관에서 중년의 장애인과 마주쳤다. 혼자 문 앞에 나와 있는 건 처음 봤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짓가랑이를 올리더니 맨살을 아래위로 더듬었다. 뭔가를 찾은 모양이다. 그는 씩 웃으며 찾은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다가가서 봤더니 개미 한 마리다. 어쩌다 바지로 들어간 놈을 잡은 뒤 그는 희희낙락이다. 그는 개미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그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그가 벌떡 일어섰다. 내 팔을 잡아끌더니 돌아가란다. 개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선가에 떠도는 짧은 시구 하나가 기억난다. 만행 나가는 스님을 보고 읊은 소리다. ‘아이구, 스님/ 보시행 그 걸음에/ 나, 개미 죽소’
추석이 다가와도 ‘애달픈 집’은 여느 날처럼 고즈넉하다. 오늘 아침 이 집 외벽에 현수막이 걸렸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딸이 그걸 보고 와서 추석날 떡 들고 가자고 한다. 들어갈 때는 현관 앞 개미를 조심해야겠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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