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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꼬뮨 스쿨’ 이야기 / 박기호

등록 2008-08-29 22:07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
삶의창
우리 공동체에는 4명의 중고생이 있다. 2년 전 연초쯤 그들과 얘기했다.

“금년에는 휴학하고 집에서 농사짓자. 공부 안 해도 된다. 놀면서 부모님들 일손을 돕자. 1년씩 놀게 되면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라. 대학 가려고 재수 삼수도 기꺼이 하지, 2∼3년 백수로 사는 건 흔하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1년은 엄청 소중해. 금년 한 해는 너희들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소중한 시기일 수도 있다. ‘부모님은 무슨 생각에서 도시생활을 버리고 공동체를 선택하셨나?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이런 산촌 오지까지 데려왔을까?’ 그 이유를 묻고 깨치거라. 학교는 다시 가면 된다.”

법적으로 휴학은 안 된다 해서 자퇴를 했고 홈스쿨링이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책 보고 오후에는 어른들 곁에서 일하는데 그 모양새가 가관이다. 좀 쉬운 일 찾느라 뺀질대고 손에 흙이 묻을세라 장갑은 두 개씩 겹쳐 끼고, 옷에 묻은 흙 털어내는 데 한 시간, 물 가지러 간다 한 시간, 심부름 보내면 한 시간, 분명히 손에 들고 나갔던 농기구는 어디다 두었는지 돌아올 땐 빈손이다. 어딘가 밭두렁에 처박혀 있겠지.

그래도 변화는 놀라웠다. 한창 크는 시기에다 힘을 쓰기 때문인지 식사 때면 밥그릇이 머슴밥처럼 수북해서 손님 보기 민망스럽다. 쑥쑥 컸다. 서너 달 지나니 20㎏ 퇴비 포대를 번쩍 들어 던지고 어깨에 메고 밭고랑으로 들락거린다. 무엇보다 예의염치가 생겼다. 어른이 무거운 걸 들고 오면 달려가 받을 줄 안다. 새참 때면 감자 한 개, 물 한 컵이라도 어른 먼저 드시게 한다. 동생들도 챙긴다. 농사는 엉성해도 자식농사는 풍작이었다. 참 보기 좋았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야성의 창조력이 경이로울 뿐이다. 성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에게 ‘노동하고 기도하라!’ 강조했다. 이때의 노동이란 ‘밭일’을 말하는데 그 생활 자체가 영성수련의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라틴어가 ‘흙, 사람, 겸손’을 같은 어원으로 쓴 이유였나 보다. 암튼 흙에는 영적이고 겸손한 삶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학생들은 어깨너머로 기타 반주를 익혀 공동체 전례와 기도를 맡았고, 소·닭·염소 등 축산을 관리했다. 함께 사는 공동체와 그들의 부모 모두 만족이었다.

이듬해 약속대로 저마다 복학했다. 아이들도 좋아했다. 그것도 잠시, 개학과 함께 피곤한 생활이 찾아왔다. 새벽미사가 끝나면 서둘러 아침을 먹자마자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20분간을 뛰어 내려간다. 보충학습을 안 하고 귀가하는데도 마을에 도착하면 저녁기도가 끝난 8시가 된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니 어깨는 처지고 무엇보다 얼굴 볼 일이 줄어들고 공동생활도 어려워졌다. 그들은 마을 일도 축산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이건 아닌데 …’ 생각하면서도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결심했다. 학교를 그만두기로 ….

지금은 모두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는 노동하는 생활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를 ‘꼬뮨 스쿨’이라 한다. ‘공부해서 남 주자!’, ‘나를 위해선 놀 수 있지만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면 공부하자’는 공동체 세계관과 소명의식을 강조한다. ‘어륀지’ 고액과외, 국제중, 외고, 특목고, 다 좋은 길이다. 그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오늘도 이미 행복하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감사와 기쁨 속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것을 믿고 있다. 공동체 삶에는 서로 경쟁하지 않고도 함께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한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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