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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얘야, 새우는 너 먹어라” / 손철주

등록 2008-08-15 21:33

손철주  학고재 주간
손철주 학고재 주간
삶의창
후텁지근한 한낮, 인사동에서 모과차를 마셨다. 달콤한 맛이 혀끝에 감기자 어릴 때 다니던 외가가 생각났다. 나는 감기에 걸려 종일 쩔쩔맸다. 보다 못한 외숙모가 꿀에 재운 모과를 건넸다. 달디단 그 맛은 참말이지, 꿈결 같았다. 대여섯 살의 영혼도 팔 수 있다면, 꿀을 사고 싶었다. 밤새 퍼먹었더니 감기가 달아나고 새벽에 속이 아렸다. 외가는 꿀이 흔했고 친가는 사탕이 귀했다. 단맛은 왕왕 쓸쓸하다. 왜 그럴까. 추억 속의 가난으로 나를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봉제사 접빈객’은 종갓집의 규범이다. 조상 모시고 손님 치르는 일이 종부의 평생 노역인 마을에서 자라, 나는 그걸 좀 안다. 아버지는 접빈객의 조심스러움을 강조했다. 조선 중기 이달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나를 깨우치기도 했다. ‘나그네 떠나고 머무는 것(行子去留際)/ 주인 눈썹 사이에 달렸네(主人眉睫間)’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주인이 찡그려 손님이 떠나는 게 아니라 곳간이 비어 손님을 못 맞는다. 손님이 와야 쌀밥을 먹던 집이 있기는 했다. 살림살이가 나은 이웃집에서 쌀과 찬거리를 꾸어왔으니까.

이밥이라면 제삿날이 돼야 한술 떠먹은 산골 출신 사학자와 함께 궁핍한 시절을 돌이켜본 적이 있다. 그는 반 우스개 삼아 이야기 한 토막을 꺼냈다. 탑골공원 뒤편 좌판에서 사천원짜리 냉면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신 저녁 나절이었다. 시름 겨운 가난은 부실한 안주를 풍요롭게 하는 화제다. 네댓 순배에 불콰해진 그는 동네에서 가장 못살던 집 아이가 서럽게 운 사연을 꺼냈다. 그 집에 타관 어른이 찾아왔다. 먼 길 온 분에게 진지를 올리려 했지만 독이 비었다. 엄마는 옆집에 뛰어가 쌀 한 보시기를 빌렸다. 아이는 어른 덕에 쌀밥 먹는 줄 알고 기뻤다. 상을 본 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한 그릇뿐이었다. 보채는 아이에게 엄마는 “어른이 밥을 남기면 줄게” 하며 달랬다. 아이는 상머리에 붙어 밥그릇만 쳐다보았다. 잠시 뒤에 아이가 울며 뛰쳐나왔다. 엄마가 붙들고 묻자 아이가 성에 받쳐 하는 말. “밥에 물 말아버렸단 말이야!”

가슴 아픈 모정이 있는가 하면 농담으로 감춘 부정도 있다. 지금 어엿한 중역이 된 내 후배는 오남매 집안에서 배를 곯고 자란 기억이 있어 구황식품에 밝다. 못 먹던 지난날을 얘기할 때 도리어 그의 눈빛이 활기를 띤다. “일식삼찬은 먹었다”고 우기지만 보리밥에 푸성귀가 다였을 형편을 내가 안다. 그가 들려준 얘기다. 일곱 식구가 모여 식사하던 어느 날이었단다. 접시에 담긴 반찬을 아껴가며 먹는데 밥은 남아도 접시는 바닥났다. 이내 수저를 놓으면 다른 식구가 미안해할까봐 후배는 밥만 떠 넣었다. 접시 바닥에 청화 빛깔 새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물끄러미 접시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그 새우는 너 먹어라.” 그때 새우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고, 새우를 양보한 아버지의 익살을 잊을 수 없노라고, 후배는 짐짓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나는 그 후배와 자주 낙원동 골목에서 삼천원 내고 칼국수를 먹는다. 값 싸고 양이 푸짐하다. 천오백원짜리 국밥도 먹고 싶다. 후배는 나의 구질구질함을 탓하면서도 싫지 않은 낯빛이다. 가난한 음식에 대한 향수만이겠는가. 가난은 마냥 추억인 것도 아니다. 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을 넌지시 들려준다. 옛 화가는 붓으로 달을 그리지 않는다. 구름을 묘사해 달을 드러낸다. 동양화의 달은 안 그려도 보인다. 후배가 “요설치고는 현란하구만”하며 비웃는다. 가난은 대낮에 달 보듯 해야 한다. 이 말을 요즘 아이들은 어렵다고 한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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