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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보수의 선진화부터

등록 2008-08-03 21:44수정 2018-05-11 16:01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국방부가 23종의 책을 불온서적이라고 발표했다. 어느 누리꾼의 말처럼 여름 휴가철에 읽을 책을 골라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1980년대 백골단이 되돌아온 때 더위를 쫓는 데도 안성맞춤이겠다. 하지만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것은 이번 일이 다시금 우리 사회에서 품격 있는 당당한 보수를 찾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전야에도 수많은 금서목록이 있었는데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고 한다. 하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유와 평등 사상을 담은 ‘불온한’ 책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야한 ‘남녀상열지사’류의 ‘불온한’ 책들이었다. 볼테르는 금서 저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관용(톨레랑스)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사상과 종교 등의 차이를 용인하여 차별·억압·배제의 근거로 하지 말라는 성찰 이성의 요구인 톨레랑스는 공존·상생의 조건이며 다양성 추구의 전제다. 건전한 진보, 합리적 보수는 앵톨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할 줄 알아야 한다. 차이를 용인하는 대신 앵톨레랑스를 용인할 때 건전한 진보, 합리적 보수의 자격은 사라진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세력은 기껏해야 스스로 앵톨레랑스를 행하지 않는 데 머물 뿐 앵톨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할 줄 모른다. 국방부든 어디서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을 벌일 수 있다. 요는 그런 시대착오적 일탈행위에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있다. 이 땅의 불행은 학자든 언론인이든 정치인이든 보수 인사들 중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이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선진화가 가장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경제력이나 국방력보다 문화의 힘을 강조한 보수주의자 김구 선생의 품격이나 68년 5월 학생혁명 당시 관계관대책회의가 열렸을 때 19세기 상징주의 시인 네르발의 시를 읽으며 총리와 장관들을 기다렸던 파리 경찰청장의 품격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워낙 반세기 넘는 동안 극우 헤게모니에 기생하고 사익을 추구하면서 한몸이 된 탓일까,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침묵하는 것일까. 보수의 세상이고 보수가 넘쳐난다는데, 당당한 보수를 도무지 만나기 어렵다.

청와대가 ‘강남 몰표’를 ‘국민적 지지’라고 주장할 때 한마디 쓴소리할 줄 아는 합리주의 보수를 찾기 어렵고, 농수산부 관료가 미국산 쇠고기 협상을 ‘미국의 선물’이라고 떠들어댈 때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한마디 던질 줄 아는 민족주의 보수를 찾기 어렵다. 공영방송을 관영방송으로 만들려고 검찰을 동원하고, 문화부 장차관이 문화에는 관심 없이 사람 몰아내는 데만 혈안이 돼 있을 때, 서울경찰청장이 촛불시민들에게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쏘겠다고 할 때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자유민주주의 보수를 찾기 어렵다. ‘잃어버린 10년’ 이전이나 이후나 변화가 없으니, 보수 집단은 사회를 선진화하기 전에 자신부터 선진화할 일이다.

책은 ‘모든 세계와 만나는 창’이라고 했다. 또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라고도 했다. 보수 집단에게서 품격이나 당당함, 합리성을 찾기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책을 읽지 않은 탓이 아닐까. 아니면 재테크, 부동산 관련 서적이나 따위의 책만 읽은 탓일까? 우리 모두 국방부 선정 도서를 읽자. 보수의 선진화를 위해, 경제동물의 이명박 시대에 불온한 인간이 되기 위해.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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