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일까. 요즘 벌어지는 일들이 정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명박 정부가 ‘촛불 정국’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을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때의 어려움은 지나가고 정권은 다시 본래의 막강한 힘을 회복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한나라당이 180석 가까운 거대 여당으로 변신한 건, 그런 힘의 회복을 과시하려는 욕구의 분출이다.
자신감을 되찾은 이명박 정권의 남은 4년7개월은 어떻게 진행될까?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게 정치라지만, 나비의 날갯짓 하나로 몇 해 뒤 해일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게 또한 정치다. 분명한 건 이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와이티엔>(YTN) 사장에 측근 인사를 앉히고, 경제위기 와중에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정치인 낙천자를 임명한 건 상징적 징표다. 이런 기세로 올 하반기엔 스스로 ‘개혁’이라 일컫는 사안들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것이다. 핵심은 방송 개편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인사들은 사석에서 “한국방송 사장을 바꾸고 문화방송을 민영화하는 건 더 미룰 수 없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한다. ‘잃어버린 10년’의 흔적을 지우려면 방송사를 ‘좌파’의 손에서 빼앗는 게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보는 탓이다. 가을 정기국회엔 한나라당의 국가기간방송법안이 상정되고, 격렬한 정치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변수는 경제다. 하반기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안 좋아질 가능성이 높다. 오로지 경제만 내걸고 집권한 이 정권에 이런 상황은 독약과 같다. 국민들은 ‘경제도 안 좋은데 방송사 개편 문제로 정치싸움을 벌일 겨를이 있느냐. 우선 경제부터 살리라’고 소리칠 것이다. 거대한 한나라당과 소수 야당의 싸움이 꼭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전개되리라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다. 경제를 살리려면 여야의 초당적 지원이 절실한데, 정치에선 첨예한 이념 대결을 추구하는 딜레마에 이명박 정권은 빠질 수밖에 없다.
지지부진함의 돌파구는 개헌이 될 수 있다. 이미 정치권에선 개헌론의 연기가 슬슬 피어오르고 있다. 개헌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문제다. 2012년 4월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른다면, 이 대통령은 임기를 8개월 가량 포기해야 한다. 총선 날짜를 늦춰 가을에 동시 선거를 하더라도 몇 달의 임기 단축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개헌 추진이 본격화하는 그 순간부터 현직 대통령의 힘은 급속히 약화된다.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하다.
촛불시위 와중에서 이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진보뿐 아니라 보수 진영도 실망시켰다. 보수 진영은 ‘아침이슬’에 감동하는 이 대통령의 본심을 의심했다. 끝까지 이 정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별로 없다. 현정권이 계속 흔들린다면,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 내부에선 ‘차라리 대통령 임기를 단축하더라도 빨리 개헌을 하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 대선을 앞당겨 치르는 게 재집권에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이다. 한나라당엔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해 정몽준 최고위원, 오세훈·김문수·원희룡 등 차기 주자들이 즐비하지만, 지금 민주당에선 경쟁력 있는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 개헌을 피할 수 없다면 청와대는 내각제를 선호하겠지만,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하는 한 내각제 개헌은 어렵다.
무더운 한여름밤에 촛불집회 이후의 정국을 한번 그려봤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할지, 정치적 공상으로 끝날지는 이 대통령한테 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피할 수 없는 덫에 빠져드는 것 같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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