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스포츠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지난주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우리 히어로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였습니다. 롯데 팬들의 감칠맛 나는 응원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1루 쪽 관중석은 노래와 율동, 함성으로 흐드러지고 있었습니다. 문득 서울 시청 앞 광장의 촛불집회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어, 여기도 촛불이 있네….’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주라’란 말을 아시나요? ‘아’는 ‘아이’의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롯데 응원단 쪽으로 파울볼이 날아와 누군가 잡으면, 롯데 팬들은 “아·주·라!” “아·주·라!”를 외칩니다. 아이에게 주운 공을 주라는 말입니다. 매번 파울볼이 넘어오면 그렇게 해서 공은 조무래기들의 손으로 건너갑니다. ‘키스 타임’도 볼만합니다. 이건 대부분의 프로야구 구단들도 펼치는 행사입니다. 공수 교대 때 스코어보드의 대형화면에 한 쌍의 연인이 크게 잡힙니다. 관중들은 “키·스·해! 키·스·해!” 하고 외칩니다. 그렇게 멍석을 깔아주는데 키스 안 하고 버티는 커플은 없더군요.
멕시코 용병 카림 가르시아는 올해 프로야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입니다. 현재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롯데 팬들은 그를 위해 ‘가르시아송’이란 노래까지 만들었더군요. 가르시아가 타석에 들어서면 헨델의 <메시아> 멜로디를 따온 이 노래를 관중들이 부르는데, 자못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프로야구장은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 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야구장에 여성과 어린이가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는 지난해부터 들려왔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이어지는 호프집 2차에서도 선남선녀들의 축제는 계속됐습니다.
이들 틈에 끼여 생맥주 한잔을 걸치면서, ‘아, 이게 촛불이구나!’ ‘우리 사회는 이미 곳곳에 촛불이 넘쳐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라!” 하고 외치는 롯데 팬들의 마음은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촛불광장’을 찾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키스 타임’을 즐기며 호쾌한 타구에 환호하는 여성 팬들은 촛불광장의 미니스커트 부대입니다.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정치적 입장이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장이나 촛불현장을 관통하는 문화적 저변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2-4로 뒤진 9회 말 1사 롯데의 공격. 롯데 응원석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 순식간에 목동구장은 ‘부산 갈매기’로 뒤덮였습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반, 야구장에 울려 퍼지던 ‘부산 갈매기’ 노래에는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아(해태의 후신) 팬들이 즐겨 부르는 ‘목포의 눈물’ 역시 그 시절 호남 사람들의 ‘비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목동구장에서 ‘부산 갈매기’를 따라부르며 잠시 그 시절 생각에 잠겼습니다.
촛불은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한 줄기 외로운 불빛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젠 시청 앞 광장에도, 프로야구장에도, 호프집에도 온통 촛불이 넘쳐납니다. 촛불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닙니다. 이 시대 사람들 가슴에 함께 타오르는 순수함이요, 사랑이요, 열정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그랬듯,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촛불은 계속될 것입니다.
백기철 스포츠부문 편집장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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