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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우회전의 기술 / 박찬수

등록 2008-05-19 20:44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이명박 정부의 위기를 보는 눈은 다 다르다. 여야뿐 아니라, 여권 내부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진단 속에서도 청와대와 한나라당, 보수 논객들의 의견이 모아지는 지점이 하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 각 부문에 뿌리내린 좌파세력이 예상보다 훨씬 견고하다’는 인식이다.

지난해 대선과 4월 총선에선 한줌 모래알에 불과했던 이 세력이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계기로 결집해 반격에 나섰다는 게 보수 진영의 상황 판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10년 그늘이 크고 그 뿌리도 생각보다 깊다”고 에둘러 표현한다. 보수 논객들은 좀더 솔직하게 ‘좌파의 부활’에 적색 경보를 내린다. ‘비과학적인 선동으로 정치적 세 확장을 꾀하는’ 좌파의 행태를 비판하는 한편으론, 상황이 이런데도 서로 분열한 채 정신 못 차리는 보수 진영을 향해 준엄한 비판이 곁들여진다. 한나라당에서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의원은 “좌파세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개혁’을 하려면 세심하게 반대세력을 포위하고 무력화시켜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그 점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전한 먹거리의 욕구를 이념 투쟁의 최전선으로 해석하는 게 처음엔 생뚱맞기도 했지만, 수많은 ‘우익’들이 입을 맞춘 듯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도 현실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좌파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건 내가 좌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진보’라는 말 대신 ‘좌파’라는 단어가 ‘우익’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쏟아져 나오는 건 새로운 현상이다. 보수의 대칭이 진보고 우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게 좌파인데, 굳이 그런 단어를 쓴다고 탓할 이유도 이젠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내린 좌파의 뿌리가 탄탄하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지만, 너무 협소하다. 뿌리는 10년 동안 내린 게 아니라 20년 동안 내린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는 그만큼 민주화되고 다양해지고 변했다. 우파가 깜짝 놀라는 건 그 변화가 깊고 넓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에 나온 10대들은 자율성의 신장을 뜻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5공식의 교사 동원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 압승은 보수진영에 과도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두 차례 선거결과가 우리 사회 이념지형의 격변을 뜻하진 않는다. 국민들이 보수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진보정권의 실패가 반사적으로 이 대통령에게 승리를 안겨줬을 뿐이다. 굳이 좌파가 선동하지 않더라도 국민들은 언제든지 이 정권에서 등을 돌릴 수 있다. 가치를 배격하고 오로지 실적만을 내걸고 집권한 이 정권은 과거 어느 보수 정권보다도 불안정하다.

10년 동안 정권을 잃고서 우파는 ‘뉴라이트’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면서 자기개혁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10년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게 별로 없다는 걸 요즘 드러내고 있다. 말로는 선진화를 외치지만, 이명박식 실용주의에서 보이는 건 퇴행성이다.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전화를 직접 받고 공항에 귀빈실을 만드는 게 이 정권이 기업 활동을 도와주는 방식이다. 실용주의가 아니라 신권위주의라 부르는 게 타당한데, 20년 동안 진보한 우리 사회에 이게 맞을 리 없다.

국민은 이명박 정권에 5년을 맡겼다. 그러나 우회전을 하더라도 제대로 길을 보고 해야 한다.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방향을 틀어 안전벽을 들이받는 건, 좌회전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 벽을 좌파가 세웠다고 탓하기 전에, 지금이 우회전할 지점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박찬수 논설위원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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