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2006년 여름 워싱턴에서 민주당의 한 선거전략가를 만나, 차기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유력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글쎄 …, 아마 어려울걸”이었다. 주별 투표의 승자가 그 주에 걸린 선거 인단을 독차지하는 독특한 미국 대선 시스템에선, 선거 승패는 결국 중도 성향의 몇몇 큰 주, 곧 오하이오와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에서 갈린다. 이들 주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만큼 진보적이지 않다. 여성인 힐러리로선 큰 주를 따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민주당은 그를 후보로 내세우지 않을 거란 얘기였다.
예측은 틀렸다. 힐러리는 민주당 경선에서 여전히 버락 오바마에게 고전 중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일 예상을 깨고 오하이오에서 크게 승리했다. 비공식 투표지만 미시간과 플로리다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끌어냈다. 이제 힐러리의 가장 큰 버팀목은 ‘대형 주’에서의 경쟁력이다. 약점을 강점으로 변화시킨 데 정치인 힐러리의 생명력이 있다.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도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나선다. 유명세를 치르면서도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한 여성 정치인 셋이 눈길을 끈다.
통합민주당의 강금실 최고위원은 비례대표를 택할 것이라고 한다. 서울에 출마하라는 당내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전략적으로’ 비례대표를 택했다고 그의 주변에선 설명한다. 그를 잘 아는 당내 인사는 “지금 전국적으로 표를 몰아올 수 있는 사람은 강 최고위원밖에 없다. 한 지역구에 붙잡혀 있는 것보다 전국 순회 유세를 다니는 게 당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맞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 선택이 그의 정치적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유권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정치에서 안전한 길엔 언제나 그걸 상쇄하는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은 정치 1번지인 서울 중구를 택했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택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측면이 크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서울 강북지역 출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펄쩍 뛰었다. 강남에 비하면 당선 가능성이 훨씬 낮아지기 때문이다. 원치는 않았겠지만, 중구 출마는 오히려 그에게 약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도약을 원한다면, 화사한 강남풍의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그로선 그 이미지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의 심상정 공동대표는 일찌감치 경기 고양 덕양갑에 출사표를 던졌다. 교육과 복지에 관심이 높은 이 지역의 특성이, 진보 정치가 지향하는 지역사회의 비전과 어울리는 것 같아 택했다고 한다. 젊은 샐러리맨들이 많이 산다고 하지만 수도권 중산층 지역인 이곳이 진보 정당 후보인 그에게 유리할 건 별로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당과 달리, 심 대표가 기댈 수 있는 정당 프리미엄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엔 진보 정당마저 둘로 갈라져 그가 기댈 언덕은 훨씬 협소해졌다. 인물 때문이 아니라 정당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심 대표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결국 심상정과 한나라당의 싸움이다. 자신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꿋꿋함이 느껴진다.
2월 말, 미국의 유명한 보수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은 “이제 민주당의 누군가가 힐러리에게 그만두라고 말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힐러리는 보란 듯이 3월4일 예비선거에서 부활했다. 두 차례나 탈락의 위기에서 되살아난 힐러리에게서, 미국 유권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건 ‘강인함’이다. 여성 정치인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부분도 그게 아닌가 싶다.
박찬수/ 논설위원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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