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식/정치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인적 청산론’(또는 ‘코드인사 적출론’)이 요즘 쟁점입니다. 지난 11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이제 새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분들로 바뀌어야 한다”고 포문을 열면서 시작됐죠.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물러나야 한다”고 가세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었습니다.
<한겨레> 편집회의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정권이 바뀌면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장들이 대부분 바뀌었으니, 정부·여당의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 않으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대로 일종의 ‘상도의’가 아니냐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우선, 문화예술 기관장들한테까지 ‘코드’가 맞지 않으니 물러나라고 하는 게 온당하냐는 점입니다. 문화예술은 다른 분야와 달리 정치·이념·사상적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권 코드에 맞춰 그때그때 기관장을 바꾼다면, 그것은 코드 중심으로 문화를 획일화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좌파 문화권력’ 운운하더니 이제 ‘우파 문화권력’을 만들려는 거냐는 비판도 나옵니다. 당장 물갈이하고 싶다면 그동안 업무처리가 편파적, 당파적이었다거나 아니면 무능했다는 최소한의 시빗거리라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로,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을 위한 ‘낙하산 인사’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낙하산 인사’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낙하산 비율이 줄고 상대적으로 전문가 기용 비율이 꾸준히 늘어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주요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법으로 보장하는 임기제를 도입하고 임용절차를 비교적 투명하게 고친 것도 이런 변화의 산물입니다. 이런 변화들은 아마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아닌 다른 정치세력이 집권해도 추진했을 만한 ‘진화’이고,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선진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 정부와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보면 우리 사회의 진화 성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회귀적인 인상이 짙게 풍깁니다. ‘인적 청산론’에 처음 불을 지른 안상수 원내대표가 공천 탈락자들을 겨냥해 “당에서 배려하리라고 본다”며 낙하산 인사의 속내를 드러낸 것은 이런 우려를 증폭시킵니다.
끝으로, 밀어붙이기식 추진 방식도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와 관광공사 사장은 최근 문화부 업무보고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현장 중심 브리핑이어서 장소가 좁아 모두 불참시킨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속내’가 뻔히 드러나 보입니다. 감사원의 공기업 감사설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모욕감을 주어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과거처럼 정보기관의 뒤캐기가 이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성행하던 ‘수법’이 다시 되살아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정권담당 세력이 자신들의 이념과 비전을 정책에 담아 밀고나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점차 우리 사회의 제도적 ‘자산’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합리화, 투명화의 성과물마저 송두리째 뒤엎는 것은 분명 퇴보입니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분명하게 시시비비를 가리겠습니다.
박창식/정치부문 편집장 cspcsp@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